값비싼 은총 – 장재형목사

1. 값비싼 은총과 죄와의 싸움

값비싼 은총과 값싼 은총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며, 동시에 많은 신자들이 고민하고 실족하기도 하는 부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강조하며, “값비싼 은총”이 결코 “값싼 은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값비싼 은총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로 인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말 그대로 거룩하고도 존귀한 은혜이다. 우리는 본래 죄 가운데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 아들의 희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마치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당연시되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값싼 은총”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고귀함을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공짜로 얻은 자연스러운 결과물’ 정도로 여긴다면, 그것은 신앙의 길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파괴하는 죄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값비싼 은총이 값싼 은총으로 바뀔 때의 파렴치함을 두고, 이것을 “치명적인 죄”라고 부른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가를 모른 채, 그저 교회 안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이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구원의 확신을‘쉽게’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진지하게 묵상하지 않게 된다면, 결국 우리 신앙의 본질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절절함을 우리가 망각한다면,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형언할 수 없는 육체적·영적 고통을 오직 ‘머릿속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넘긴다면, 우리는 곧바로 값싼 은총에 빠지게 된다. “값비싼 은총”은 곧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의 사건이 불러일으킨, 말 그대로 하늘의 선물이요,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은혜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선물은 신자의 모든 존재를 변화시키며, 영혼 깊숙이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원받은 신자”에게 또 다른 도전이 뒤따른다. 그것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틀거리는 죄성(罪性)”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임을 상기시키며, 죄의 세력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법적 선언’(칭의)을 받았음에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안에는 여전히 악습과 죄에 물든 습관들이 자리한다. 이러한 죄의 흔적이나 본성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하나님과 멀어지려는 방향으로 속삭인다.

구원받은 존재 안에 공존하는 “두 가지 나” — “구원받은 나”와 “구습에 젖은 나” — 이 둘이 서로 대치하면서 갈등을 일으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조를 “나”와 “나 아닌 나”가 공존한다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이 둘의 갈등은 신앙생활에서 수시로 발생하며, 특히 우리의 인격이 이전보다 나아졌나를 스스로 점검할 때, ‘왜 여전히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가, 왜 아직도 죄적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라는 자책과 혼돈이 찾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가 로마서 7장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다. 바울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죄적 본성과 씨름한다. 이런 씨름은 곧 성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영적 싸움이다.

결국 “값비싼 은총”을 받은 자가 맞이하는 또 하나의 핵심 과제는 “구원과 성화 사이의 갈등을 올바로 이해하고 싸우는 것”이다. 값비싼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치부하지 않으려면, 먼저 ‘십자가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왜 나는 여전히 죄를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려 하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럴 때 “이미 받은 구원”과“아직 이뤄져야 할 구원” 사이에서 혼동이 적어진다. 구원은 최종적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 분명 존재하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죄를 벗어버리는 실천을 해야 한다. 그때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의 확신을 얻는 두 가지 순간을 함께 맛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값비싼 은총과 죄의 습관에 대한 투쟁”이라는 주제를 두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죄와의 전쟁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무감각해져서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외침으로 죄의 작동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값비싼 은혜를 다시 싸구려로 만드는 길이다. 반면 죄를 심각하게 의식하여 ‘항상 나는 죄인이니 어떡하나’ 하고 마냥 자학에 빠져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주는 완전한 구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고, 늘 “값비싼 은총”에 합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마음이 필요하다.

로마서 7장 25절에서 이어지는 8장 1절, 즉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묵상해야 할 대목이다. “7장에서의 탄식”과 “8장에서의 승리의 선언”이 곧바로 이어지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7장의 탄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8장 1절이 “그러므로”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죄와 씨름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신자라 할지라도 절대 구원의 확신을 놓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향해 영원히 열려 있으며, 구원받은 신자는 결코 완전히 정죄되지 않는다는 선언이야말로, 값비싼 은총을 붙드는 핵심이다.

이처럼 “값비싼 은총”을 받은 이들이 죄와 싸우는 이유와 필요성은 명확하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영적 전신갑주’를 언급하면서 거듭 강조한다. 구원받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잡고 죄와 맞서 싸워야 한다. 비록 어떤 순간에는 죄가 가인처럼 아벨을 죽이는 것처럼 우리를 누르고 넘어뜨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또다시 우리에게 가죽옷을 입히듯이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덮어주신다. 이러한 반복과 은혜의 경험, 즉 넘어졌다가 회복되고 다시 나아가는 신앙의 과정은 우리가 계속 “값비싼 은총”을 붙들고 산다는 증거다.

결국 첫 번째 소주제에서 장재형목사가 핵심적으로 말하는 바는,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 또한 극도의 고통과 희생 위에 세워진 존귀한 것이다”라는 점이다. 이 은혜가 가벼이 여겨져서는 안 되며, 또한 과도한 죄책감으로 구원의 기쁨을 잃어서도 안 된다. ‘값비싼 은총’이기에 우리는 마땅히 죄와 씨름하며, 그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점차 주님을 닮아가는 여정을 걷는다. 그리고 이 여정에는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정죄함이 없고, 그러므로 날마다 “구원의 확실성”을 놓치지 않고, 동시에 “죄와의 거룩한 투쟁”을 계속해나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2. 칭의와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의 의미

장재형목사는 바울 사도가 강조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바울이 로마서 5장부터 8장에 걸쳐 전개하는 논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신자가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붙들면서도 동시에 죄와 싸워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칭의(justifica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법정적 무죄 선언을 받은 상태이다. 이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의 결과이며,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즉, 우리가 스스로 율법을 완벽히 지켜서 성취해낼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하여 값없이 주셨다. 이것이 바로 ‘값비싼 은혜’가 지닌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칭의의 상태에 들어온 후에도 우리의 실제 삶과 인격, 즉 ‘성품과 행동’은 여전히 완전치 않다. 성화(sanctification)는 칭의 받은 사람이 점진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삶 전체에서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실천과 투쟁이 포함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성화의 과정을 지나며 곧잘 “이게 뭐가 달라졌지?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실존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며 낙심하거나, 또는 “더 이상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착각함으로써 교만해지는 두 가지 극단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하였듯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도 우리는 매 순간 죄를 경계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얻었기에, 그 싸움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이중적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 칭의와 성화는 이중성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칭의를 받은 자가 성화를 이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성장 궤도’이며, 하나님은 이 길을 가는 우리에게 성령의 내주와 도우심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두 마리 토끼, 즉“구원의 확신(칭의)과 죄와의 거룩한 투쟁(성화)”을 동시에 붙드는 길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상론이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로마서 7장 후반부와 8장 초반부를 하나로 이어 보라고 권면한다. 로마서 7장 25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구절에 이어지는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가 분리되어 이해되면 안 된다. 오히려 두 구절은 이어지며,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되어야 한다. 즉, “여전히 죄적 습관에 끌리는 갈등이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유명한 표현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단지 예수님을 존경하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윤리적 모방 수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말씀처럼, 신비로운 영적 연합(union)을 가리킨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있으면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듯이,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날마다 생명을 공급받으며 살아간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구조를 표현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영적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죄의 노예로 전락하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이 신비로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개념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계명의 완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듯,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안의 순종이 만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체험하게 된다. 율법을 통한 정죄와 벌의 논리가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 대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이 곧 우리의 영적 호흡이 된다. 이처럼 사랑으로 연합된 상태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라는 한마디로 집약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일부 율법주의자들은 오해해서, ‘그렇다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의도는 정확히 그 반대이다. 이미 죄인이었는데 용서받고 자유 얻은 자가, 어찌 다시 죄의 종살이로 돌아가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다시 죄와 타협하는 삶으로 회귀한다면, 그것은 앞선 소주제에서 지적한“값비싼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만드는 죄악”이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없음’을 자만의 근거로 삼기보다, 오히려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으라는 것이 로마서 8장의 맥락이다.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선언(롬 8:2)은 더 이상 죄가 왕 노릇하여 우리를 압도할 수 없음을 뜻한다. 동시에,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육신의 행실을 날마다 죽이는’ 싸움을 지속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칭의와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원을 얻은 신자의 정체성은 “나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래서 죄에 대해 날마다 죽으면서 더욱 주님을 닮아간다”는 진리에 의해 정의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설명하며, 우리는 이전과 ‘형태적으로는 비슷한 문제’를 겪더라도 ‘본질이 달라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를 ‘동형이질(同形異質)’이라는 표현으로 비유하며, 구원 전과 구원 후에 똑같아 보이는 고난이나 죄의 유혹을 맞닥뜨려도, 그 질(質)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제는 죄로 인해 생기는 고난이 아니라, 의로운 자의 고난이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 혹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겪는 고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밝혔다. 이는 철저히 매일의 삶에서 자기부인과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방식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이 전혀 즐거움이 없는, 기계적이며 고통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죄와 싸우면서도 동시에 구원의 큰 기쁨과 소망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는 이 모든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선언이다. 즉, 7장 말미의 탄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8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라고 말한다. 죄의 실존적 갈등이 여전하지만, 그 갈등이 결코 우리의 구원을 뺏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하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가장 선명히 드러났으며, 부활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확증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라고 고백했다. 그러한 영적 경탄 속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확신 있게 선포하는 것이 8장 1절의 “그러므로”에 담긴 깊은 뜻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칭의가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고, 성화 없는 칭의 또한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는 점이다. 칭의로 인해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의 습관을 몰아내는 싸움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견인하는 핵심 에너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통한 사랑의 연합”이다. 주님과의 긴밀한 영적 교제,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 기도를 통해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로마서 8장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했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가 도저히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완벽히 만족시키셨고,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의(義)가 전가된다. 동시에, 그 의를 전가받은 신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길이다.

더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목적지를 “영화(glorification)”라고 말한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우리가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에 이르는 과정은 하늘에서 날아온 ‘마법 같은 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화적 싸움을 통해 점진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짓고, 홍수를 겪으며, 새 세상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듯이, 구원받은 우리는 칭의로 인해 “방주의 상태”에 들어왔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으로 죄의 때를 씻어내며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간다. 이 모든 길의 결론이 ‘영화’이며, 결국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교훈은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의 본질을 잊지 말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적 싸움에 충실히 임하자”는 호소이기도 하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또한 신자 개개인이 단독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교회)에 속해 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이 주어졌으나, 모두 다 궁극적으로는 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비유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지만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성화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는 죄와 싸우지만, 동시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고 중보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화가 더 풍성히 이뤄진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투쟁은 결코 고립된 자아로서는 완수하기 어렵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 안에서, 서로의 약함을 돕고 성령의 은사를 교환하며 함께 자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두 번째 소주제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의 의미는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인해 완전히 드러났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자유와 능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내적 모순, 즉 계속되는 죄의 유혹과의 씨름은 ‘이미 거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는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바른 균형을 찾게 된다. 신자는 매일 죄를 죽이되 결코 스스로 정죄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함부로 정죄하는 순간, 십자가가 이룬 구원의 위력을 경시하게 되고, 값비싼 은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이미 구원받았으니”라는 이유만으로 성화의 싸움을 가볍게 여기면, 그것 역시 복음의 진수를 손상한다. 칭의와 성화 사이의 갈등은 “나태” 혹은 “자학”이라는 두 가지 함정 사이에서 늘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가 붙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이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성품을 배워간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생명의 양분이 끊임없이 공급되기에 죄와 싸울 힘이 생기고, 구원의 기쁨도 사라지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투쟁”을 균형감 있게 살피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8장 후반부에서 도달하는 절정, 즉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는 감격으로 이어진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이 장엄한 선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결코 죄와 사망, 그리고 모든 정죄로부터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진리를 최종적으로 증명해준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값비싼 은총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미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일어나려는 죄성과 맞서 싸우며, 칭의의 확신 안에서 성화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다. 결국 요약하자면, “값비싼 은총은 우리를 죄와의 투쟁으로 내몬다. 그러나 그 투쟁은 이미 승리와 확신이 보장된 싸움이다.” 그리고 그 출발과 진행, 결론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 “그리스도 안”이란 우리 신앙 실존의 토대이며, 이 토대를 깊이 붙들 때 매 순간 죄의 유혹이 몰려와도 ‘이미 구원받은 자’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이때 성령님이 우리를 돕고,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비추어주신다. 그렇게 우리는 성화의 길을 완주해 간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서서 ‘영화’에 이르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이미 값비싼 은총을 베푸신 십자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죄를 벗어버리고자 애썼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정리하자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크게 두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십자가의 희생으로 주어진 값비싼 은총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둘째, 칭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다스리고 성화에 이르라.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존재한다는 신앙적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어떤 죄도, 어떠한 영적 싸움의 어려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중에도, 정죄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은혜를 놓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는 것이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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