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우는 바울의 지혜 – 장재형목사

Ⅰ.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적대자를 대하는 바울의 자세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후서 10장 전체를 살펴보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10장 1절에서부터 나타나는 바울의 어조가 지난 고린도후서 앞부분과 다른 점에 주목하는데, 이는 바울이 단호하고도 강경한 편지를 쓴 이유와 관련이 깊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보낸 바울의 책망 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편지가 지닌 엄중한 톤, 그리고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다시 드러나는 단호함은,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교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사도적 권위의 발현이라 볼 수 있다.

10장 1절에 나오는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는 말씀에서,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바울은 직접 개척하고 가르쳤던 고린도 교회에서조차 비난을 받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다른 도시나 지역에 있을 때는 매우 강하게 편지를 써놓고 실제로 대면했을 때는 겸손하고 그다지 능력이 없어 보인다고 조롱했다. 이들은 그 당시 헬라 문화권 사람들이 중시했던 ‘수사학적 기교’, ‘웅변’ 등을 기준으로, 생김새나 말솜씨, 외적인 자질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했다. 그래서 바울을 놓고 “글은 잘 쓰는데 직접 보면 말이 서툴고, 몸도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라고 비방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이 그러한 적대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이 제시하는 두 가지 단어, “온유와 관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듯이, 바울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실천하여 교회를 치리하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헬라어로 ‘온유(praus, πραΰτης)’라는 단어는 겸손, 부드러움, 온화함을 아우르며, ‘관용(epieikes, ἐπιεικής)’은 ‘여유롭고 신중한 태도’를 가리킨다. 즉, 교회 안에 불화를 일으키고 바울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거짓교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분을 터뜨리기보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했다. 이는 단지 유약한 태도가 아니라, 내부에 강함을 지닌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세라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그러나 바울이 아무 저항 없이 수모를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고린도후서 10장 2-3절로 넘어가면, 그는 담대한 태도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다. 당시 교회 안에서 그를 모함하던 자들은 “바울과 동행들이 육체대로 행한다”, 즉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움직이고 자기 배를 채우는 자들이라고 모욕했다. 그 배경에는 8장과 9장에 걸쳐 나타나는 연보(헌금)와 모금 이야기, 그리고 로마서 15장 27절 등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재정 관련 언급이 있었다. 바울이 여러 지역 교회에서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는 주장을, 적대자들은 “실제로는 바울이 자기 육체(사적 이익)를 위해 모금을 조장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바울이 온유함과 관용을 유지하되, 적대자들이 더 이상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현혹시키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대처하려 했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도행전 20장 33-35절, 고린도전서 4장 12절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직접 손으로 일해서 생활비를 충당했고, 핍박을 받으면 참으며, 후욕을 당하면 축복으로 갚았으며, 아무의 금이나 은,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담대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삶이 있었기에 “육체대로 살지 않았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도 이 같은 바울의 태도가 좋은 본이 된다고 말한다. 모략과 오해가 생겨나도, 자신이 주님 앞에 정당하다면 흔들리지 말고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하되, 온유와 관용의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린도후서 10장 3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이 싸우는 목적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님을 천명한다. 그는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싸움이 오직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싸움임을 분명히 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의 ‘싸움’이 단순히 인간적인 다툼이나 분쟁이 아니라, 복음을 지키고 교회가 거짓 가르침에 물들지 않도록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모습임을 주목한다. 결국 바울의 온유와 관용은 그가 진리를 지키기 위한 결심과 함께 행사되는 것으로, 단순히 나약한 태도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단호함과 결합된 균형 잡힌 자세라는 점에 장재형목사는 주목한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고린도후서 10장에 선명히 나타나고, 결국 오늘날 교회와 지도자들에게도 중요한 모범으로 남아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이처럼 10장 초반부에서 언급되는 온유와 관용, 그리고 함께 드러나는 담대함과 사도적 권위는 곧장 바울의 선한 싸움과 복음의 능력,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랑과 칭찬을 받는 삶의 지표로 이어진다.

Ⅱ. 육체대로 행하지 않는 선한 싸움과 복음의 능력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4-6절에서 자신이 싸우는 방식과 동기를 명확히 밝힌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하며,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는 복음의 힘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싸움’이란, 단순히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개인적 감정을 분출하는 행동이 아니라, ‘교회를 허무는 거짓 가르침, 교만, 이기심, 세속적 기준, 인간적 자랑거리’ 등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영적 전쟁임을 강조한다. 특히 이 싸움은 인신공격이나 육체적 힘을 활용하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는” 진리의 싸움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바울은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드러내면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말한다(고후 10:5). 이는 복음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온갖 악하고 교만한 생각들을 산산조각 내어, 결국 그 생각들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는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해설하며, 참된 복음 앞에서는 사람들이 가진 잘못된 이론, 혹은 높아지고자 하는 허영과 거짓된 사고가 근본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 등에서 복음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있음을 여러 차례 선포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0장에서 역시, 교회 안을 교란시키는 모든 잘못된 이론이나 비방 역시 이 ‘복음의 병기’로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강력함 뒤에는 앞서 말한 대로 온유와 관용이 동시에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복음이 가진 능력은 적대자를 단칼에 베어버리거나 분노로 짓밟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10장 6절에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해, 잘못에 대해 단호히 징계하겠다는 의지 역시 드러낸다. 그러나 그 징계의 목적도 상대를 망하게 하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거짓으로부터 보호하고 온전히 세우기 위한, 즉 긍정적인 동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울이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후 10:7)라고 지적했듯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수사학과 웅변, 외모 등 세상의 판단 기준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직접 대면했을 때엔 말이 서툴고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바울은“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10:7)고 말함으로써, ‘누가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외적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직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려 있는가, 복음의 동기로 움직이는가, 주의 뜻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현대 교회가 범하기 쉬운 오류를 지적한다. 즉, 교회 성장이나 겉으로 보이는 능력, 혹은 화려한 언변이나 리더십 스타일 등으로 지도자나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려는 성향이다. 바울은 분명히 그런 세속적 평가에 의해 눌려 비난받는 처지에 놓였으나, 복음의 강력함을 붙들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또 이 모든 싸움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세워가는 선한 목적을 실현해 나갔다. 그가 10장 8절에서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이를 가장 잘 보여 준다. 바울에게 ‘권세’는 남을 짓밟거나 지배하려는 도구가 아니었고, 교회 성도들을 보호하고 지도하고 양육하기 위한 도구였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싸우되 그 싸움은 사랑과 온유를 근간으로 하는 선한 싸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10장 9~11절에 이르면,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는 외부 비방에 직면한 바울의 솔직한 언급이 이어진다. 하지만 바울은 편지로든 실제 대면으로든 본인이 동일한 사역을 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그는 편지에서나 실제 상황에서나 같은 사람이며, 고린도 교회를 세울 책임을 부여받은 사도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도, 지도자가 복음의 원리에 따라 일관성 있게 교회를 돌보고 가르치는 자세를 가질 때, 비난이나 오해가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10장 12절에서는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거짓교사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들을 흔드는 태도를 폭로한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를 비교하는 것’ 자체를 지혜 없다고 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교회 내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분쟁, 특히 지도자들 간의 경쟁이나 외적 평가 기준에 얽매인 갈등을 언급하며, 그것이 모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0:17)는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9장 24절도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말하지, ‘자신의 외모나 학식, 언변 등’을 자랑하라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듯이, 자기 과시가 아닌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이라면, 누구도 꺼리지 않고 어디로든 나아가는 자세가 진정한 선교적 태도임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상기시킨다.

고린도후서 10장 전체를 장재형목사가 풀이하는 핵심은, 모든 분쟁과 갈등 속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놓치지 않았으되, 동시에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타협 없는 태도로 싸웠다는 데 있다. 그 싸움은 육체적 욕망이나 세속적 도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기 위해 부여하신 권세를 선용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말은 ‘거짓과 교만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이요, 그 과정에서 수고를 다한 이들에게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라는 영예가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와 성도들도 교회 안팎의 갈등을 마주할 때, 바울을 본받아 온유와 관용을 지키되, 진리를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성숙한 모습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온유와 관용, 그리고 복음의 절대적 진리 앞에서의 강한 싸움은 결코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참된 성숙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Ⅲ. 주 안에서 자랑하며 오직 주께 칭찬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후서 10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과 적대자들의 ‘자랑’을 날카롭게 비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주의 깊게 해설하면서, 당시 교회 안에서 벌어진 본질적 문제를 다시 환기시킨다. 교회를 교란시키는 거짓교사들은 남이 이미 닦아놓은 터 위에 들어와 자기 공로를 과시하며, 성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10:13)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분량’과 ‘한계’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기신 선교 지경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도의 권위를 받은 베드로나 야고보가 유대 지역을 맡은 것처럼, 바울은 이방 지역, 즉 고린도나 갈라디아, 에베소 등 이방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한 개인적 업적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열어주신 지경 안에서 오직 복음을 위해 수고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분량 밖’ 자랑이 교회에 얼마나 해로운지 강조한다. 남이 개척해 놓은 자리, 눈물로 씨앗을 뿌린 자의 헌신을 무시하고, 그 결실을 가로채려는 행태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된다. 사실 현대 교회에서도, 교회 개척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한 이들의 수고를 폄하하거나, 다음에 부임한 이들이 그 흔적을 지우는 모습이 목격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을 하는” 어리석은 일이며, 바울이 지적한 바로 그 모습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고린도후서10장 15-16절에 나타난 것처럼,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스스로 남이 건설해놓은 터전 위에서 과시하지 않고, 지경을 넓혀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이다.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바울이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힘썼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남의 수고를 존중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지를 향해 나아가는 진정한 사도적 열정을 보여준다.

결국 바울은 10장 17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이는 예레미야 9장 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며, 그 핵심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을 자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인의 모든 자랑은 결국 ‘주님이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내가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가’에 근거해야 함을 거듭 역설한다. 즉, 남보다 학력이 좋다거나, 언변이 뛰어나거나, 외모가 훌륭하다는 식의 세상적 자랑은 하등의 소용이 없다. 그런 자랑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교회를 세우지 못하며 영적인 열매도 맺지 못한다. 바울은 10장 18절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인정’을 구하는 태도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일깨운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에 빠져서, 혹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높이며 만족하는 삶은 공허하다.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나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한다. 설령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연약하거나 무시받을 만한 조건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면 그 자는 진정으로 복된 자다. 바울처럼 외모나 말솜씨가 뛰어나지 못해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지라도, 그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자기 삶을 내어놓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칭찬하고 들어 쓰신다. 반대로, 아무리 화려한 외형과 학력, 말솜씨를 자랑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참된 칭찬과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교회 안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날 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이 “주 안에서 자랑하고 오직 주께 칭찬받는 삶의 자세”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후서 10장은 현대 교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바울의 온유와 관용,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강경함, 육체대로 행하지 않고 복음의 능력으로 싸우는 자세, 주 안에서 자랑하며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기를 사모하는 삶 등은, 교회가 분쟁과 오해로 흔들릴 때 반드시 되새겨야 할 지침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삶이 그 자체로 복음의 설교였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이 돈 문제나 인간관계 문제 등 현실적인 이슈로 비방을 받으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직 복음 안에서 자신의 삶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행해온 방식이 “육체대로 살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가 “사람들을 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하는 것”임을 명확히 증언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본질적 교훈이 된다. 교회 안에서 재정 문제나 권위 문제 등으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갖추고 있는가, 또 복음을 지키기 위한 단호함을 실천하고 있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자랑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있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업적과 능력에 있는가를 철저히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장재형목사는 고린도후서 10장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바울이 적대자들을 대할 때 보여준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었고, 동시에 그가 교회를 허무는 세력에 대해서는 분명히 맞서는 담대함을 지닌 외유내강의 자세였다는 점이다. 둘째, 바울의 싸움은 육체적이거나 세속적인 싸움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견고한 진을 허무는 영적 전투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셋째,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대상은 인간적 재주나 외모, 수사학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위해 베푸신 은혜와 역사이며, 모든 인정은 결국 “주님께 칭찬받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 지점이 고린도후서 10장이 주는 핵심 교훈이며, 오늘날 교회가 겪는 온갖 갈등과 분쟁 앞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늘 겸손과 복음 중심의 결단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결국, 고린도 교회 안팎에서 불거진 논란과 비난, 거짓교사들의 교란은,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교회를 치리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들을 대했으나, 분명히 잘못된 교훈을 퍼뜨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강한 사도적 권위를 발휘했다. 그 근간에는 ‘우리가 결국 복음 안에서 승리한다’는 확고한 믿음, 그리고 ‘사람에게가 아닌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겠다는 영적 가치관이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현대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본보기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자랑과 칭찬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의 싸움은 과연 복음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바울이 말한 ‘교회를 세우는 권세’는 지금도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지도자의 권세다. 그 권세는 기득권을 누리거나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한 믿음 안에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처럼 고린도후서 10장은 바울의 마음과 사도적 권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며, 장재형목사는 본문의 해설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적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강조한다. 첫째, 교회 안에서 비난과 모략이 발생해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 둘째, 교회와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세력과는 타협하지 말고 복음의 병기로 당당히 싸워야 한다. 셋째,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의 칭찬을 구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역시 이러한 원리를 붙들 때에야 비로소 분란과 갈등 속에서도 복음의 본질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끝으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라는 고린도후서 10장 17절 말씀을 다시 상기시키며, 누구든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힘쓸 것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칭찬하실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칭찬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평가나 인정은 한순간에 바뀌지만, 주님의 칭찬은 영원하다. 교회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온유와 관용으로 적대자를 대하되 복음을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랑을 주 안에서 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자”는 것이 고린도후서 10장을 가르치는 장재형목사의 일관된 당부이자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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