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정리는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설교한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은 빌라도의 심문과 예수님의 대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소와 위선, 그리고 결국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꺼이 가장 처절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 역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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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진리와 권세에 대한 대화
장재형목사는 빌라도의 심문 장면을 통해, 세상의 권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 펼치는 영적이고도 역사적인 대화에 주목한다. 빌라도는 그 시대 로마 제국의 권력을 대표하는 총독이었고, 예수님은 무력(武力)이나 세상적 지위가 전혀 없이, 종교지도자들의 모함과 폭력으로 인해 묶여 온 피고의 모습으로 그 앞에 서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 이어지는 빌라도와의 긴 문답 속에서,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이 죄수의 모습으로도 빌라도를 압도하는 ‘진리의 권위’를 드러내신다.
먼저, 장재형목사는 본문 18장 28절의 새벽 시간대에 주목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야바의 관정(官廷)으로 온 때가 새벽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미 밤새 모욕당하시고, 안나스와 가야바의 부당한 심문을 받으신 뒤 극심한 고통과 지친 몸으로 또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자들은 다 흩어지고, 주님 혼자 홀로 고독하게 붙잡혀 가시는 모습은 십자가의 길이 ‘주님이 홀로 걸으셔야만 했던 길’임을 상징한다. 마땅히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그 밤, 예수님은 혹독한 조롱과 구타, 거짓 증언 등에 시달리셨지만 한마디 변명조차 제대로 하시지 않은 채 침묵 가운데 가시적(可視的) 수난을 겪으셨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면 유월절 잔치를 더럽힌다고 여겼기에 빌라도의 관정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 정결함을 지키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무죄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빌라도에게 넘기는 모순을 범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들의 모습을 가리켜 “유월절의 의미와 참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위선이 극에 달한 증거”라고 말한다.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이방인 손에 넘겨주면서도, 자신들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 얽매인 채 정결례만 엄격히 지키려 애쓴다. 바로 이 지점이 종교의 외형적 율법 준수는 철저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정한 경외나 사랑은 전혀 갖추지 못한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어 빌라도가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요 18:29)라고 묻자, 대답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않았겠나이다”라는 막연한 고소였다(요 18:30). 빌라도는 예수님이 소란스러우나, 구체적 죄목이 드러나지 않음을 느끼고,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한다(요18:31).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다며(“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강제적 처벌로 넘기는 길을 선택한다. 이는 실제로는 “반드시 예수를 죽여야겠다”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만일 이들이 율법에 따라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한다면 돌로 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화(徒刑)에서 보듯,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유대 전통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김으로써, 그들은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 훨씬 비참하고 참혹한 로마의 십자가형에 넘기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교묘히 ‘극대화’하려 했다. 십자가형은 노예나 반역자, 가장 극악한 중죄인에게 가해지는 처절한 방식이었다. 뙤약볕에 나무에 못 박아 매달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도록 내버려두고, 시신도 제대로 묻어주지 않는 형벌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이 고안한 가장 끔찍하고 극악한 사형 방법 중 하나가 십자가”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죄악성이 단지 ‘예수를 죽이려 했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분을 가장 무자비하고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제거해버리려는 집요함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18장 32절에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구절이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인간의 악의가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계획대로 예수님의 ‘들림’(십자가)가 성취되도록 돕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묵상한다. 악한 자들의 간교함이 총동원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 구원의 큰 계획으로 바꾸어 선용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편,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이냐?”(요 18:34)라며 되물으신다. 이 대화 장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 의도에 직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빌라도의 ‘진의’를 묻고 계신다”고 본다. 빌라도가 실제로 정치적 반역 혐의를 묻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물어보는 것인지를 분별하시는 것이다. 빌라도는 로마의 권력자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도 예수님을 가만히 대화하며 점점 “이 사람에게서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분명히 선언하신다(요 18:36). 이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세상의 무력·정치 체제로부터 독립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왕권임을 밝히는 말씀이다. 빌라도가 듣기에는, 로마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셨듯, 세상의 왕권을 무력으로 쟁취하거나 세상적 방식으로 이룩하려는 분이 아니다. 진리는 폭력·억압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구현된다.
이때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라고 다시 묻자,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답하신다(요 18:37). 장재형목사는 “이 장엄한 선포는 예수님이 비록 채찍에 맞고 조롱당하는 처지이지만, ‘진리의 왕’으로서 스스로 증언하시는 것”이라 강조한다. 세상의 법정에서 ‘왕’이라고 자칭하면 모반죄가 되지만, 예수님은 그 위험성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내가 왕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진리’가 무엇인지를 끝까지 보여주신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라고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의 답변을 주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예수님이 이미 삶과 행동, 말씀으로 진리를 보여주셨기에, 그가 추가로 아무리 설명해도 빌라도가 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계산과 이해득실에 몰두하는 권력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라는 무죄 선고를 빌라도 입으로 선포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무죄와 의로움이 세상 권세자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명했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를 “진리를 증언하는 예수님”이라고 제시한다. 빌라도 앞에 결박된 모습으로 서 계시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세자를 심문하는 듯하다. “너는 유대인들이 나에 대해 한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냐, 아니면 직접 나에게서 진리를 알고자 질문하는 것이냐?”라고 빌라도에게 반문하신다. 이는 교회와 세상 권세, 진리를 쫓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관념적 대립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 부딪히는 영적 전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18장 후반부에 드러난 예수님과 빌라도의 문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 몰려 법정에 섰지만 실제로는 ‘진리의 왕’이심을 확증해주는 장면이며, 동시에 이 죄 없는 분이 부당하게 고소당하여 죽음에 처해지는 역설을 펼쳐 보인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침묵과 당당함이 절묘하게 교차한다”고 해석한다. 때로는 묵묵히 계시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와 “내가 왕이니라”는 분명한 자기 선언을 통해 그분의 정체성과 임무가 흔들림 없는 진리라는 사실을 선포하신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느끼고 어떻게든 놓아주려 애쓴다.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예수를 풀어주려 하지만, 유대인들은“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요 18:40)고 외치며, 바라바(강도이자 민란의 선동자, 살인죄를 범한 자)를 선택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라바란 이름 자체가 “아버지의 아들(Bar-Abba)”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더욱 상징적 아이러니를 낳는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정작 ‘바라바(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살인자)’를 풀어주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희생 덕에 죄에서 자유롭게 된, 일종의 상징적 대표다. 이 사건은 대속(代贖)의 본질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죄인’이 풀리고, ‘죄 없으신 분’이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죽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 지도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 19:6)라고 계속 외친다. 빌라도가 무죄를 주장하며 “너희 왕을 내가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까지 반문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요 19:15)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가이사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유일한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믿어 왔던 것이 유대 신앙의 핵심 아닌가? 결국 이들은 ‘진짜 왕’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장 경건해야 할 신앙 고백까지 내팽개치고 세상 권세에 부역하고 있다”고 통렬히 지적한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 안에 잠시 일어난 두려움과 예수님에 대한 호의(好意)를 지켜내지 못하고,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몰아붙이는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최종 장면을 “유대와 로마가 공모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으나, 사실은 그분이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려는 섭리 가운데 걸어가신 길”이라고 요약한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빌라도가 제시하는 타협안을 받을 수도 있었고, 혹은 로마 군병을 한순간에 뒤엎을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음에도, 스스로 ‘가장 처참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 왜냐하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는 말씀대로, 십자가만이 모든 인류를 구원할 완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빌라도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요점’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세상 왕권에 속하지 않는 ‘하늘 나라의 왕’으로서 오셨다. 둘째, 그분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으며, 진리에 속한 자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셋째,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나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나 전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이며, 결코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은 폭력이나 위선에 굴복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악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희생을 택하심으로 완전한 진리를 보여주셨다.
요약하자면,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진리와 권세에 대한 대화”는,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아들 권세가 대조되어 드러나는 장면이다. 빌라도는 정치적 권세가 있고 예수님은 포승줄에 묶인 채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모든 권세가 위로부터 주어진 것”(요 19:11)임을 아시고 당당히 진리를 선포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훗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진리를 증거하는 모형(模型)이 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교회를 심문하고 핍박하지만, 교회는 진리를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눈앞의 이익이나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진리를 위해 담대히 말해야 한다. 설령 빌라도같이 부분적으로 호의적인 권세자를 만나도, 결국은 그도 압박에 굴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는 끝까지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배운다. 이렇듯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는 교회가 처한 세상적 상황과 맞물려 큰 신학적·실천적 시사점을 지닌다.
Ⅱ.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예수님의 대속적 순종
장재형목사는 두 번째 소주제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모습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동시에 ‘신성모독죄’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는지를 부각한다. 그들은 유월절 잔치를 지키기 위해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뜰에 들어갔다가는 자신이 부정해진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정작 ‘진정한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이방인의 손에 넘겨버리며, 그 살과 피를 증오로 정죄한다. 표면적으로는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법을 지킨다며 누룩 없는 빵, 쓴 나물, 어린 양 고기 먹는 전통에 열중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끔찍한 살인 음모에 사로잡혀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신앙이 형식과 외형만 남고,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과 사랑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참혹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그들은 ‘유월절 정결 예식’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나,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인지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그저 종교 체계 내에서 자리와 권세를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없애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몰아가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진실로 그들 앞에 서 계심을 보지 못한다. 이는 “형제를 노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마 5:22)는 예수님의 경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습이며,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도 형제와 화목하라”(마 5:23-24)는 주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다.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반역자”로 고소하기 위해 점차 로마 제국의 정치 논리를 가져오면서까지 무고(誣告)한다는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왕이라 칭한다”는 거짓 혐의를 붙여서, 어떤 식으로든 사형을 끌어내려 시도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분쟁이 아니라 ‘정치적 반역’으로 몰아붙이면 로마가 사형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노리는 음모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증오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강조한다. 빌라도조차도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때려서 놓겠노라”(참조 눅 23:22)고 몇 차례나 말한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무리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고함을 질러댄다. 그토록 예수를 죽여야만 직성이 풀릴 정도로 증오가 쌓인 모습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外飾)’을 질책하셨던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겉으로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속은 온갖 악과 탐욕으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 19장 6절 이하에서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말하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요19:15)고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왕이시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했을 때,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너희 왕이 되심에도, 너희가 인간 왕을 달라 한다”(삼상 12:12)며 책망했던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나마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은 그들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공공연히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맹세하듯 외치니,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할 말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그들 안에 가득 차 있으므로, 자신들이 평소 그토록 싫어하던 로마 황제(가이사) 권위까지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 활용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종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할 때, 얼마든지 폭력과 거짓을 정당화하게 된다”는 경고적인 사례로 든다. 이처럼 종교권력은 때때로 세상 권력을 빌려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세상 권력도 종교의 지지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공생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이 ‘사두개파’ 출신이 많았다는 사실도, 이들이 정치 권력과 긴밀히 결탁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위선과 폭력’ 앞에서 끝까지 침묵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준 마지막 기회(“내가 너를 놓을 권세가 있다”)에도 타협하지 않으신 이유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구원 사역이 그분의 절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즉,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패배하거나 세상 권력에 굴복하셔서 십자가로 끌려가신 게 아니라, 스스로 순종으로 그 길을 선택하셨다(요 10:18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못하나 내가 스스로 놓노라”).
“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 19:11)는 예수님의 말씀은, 외형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판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권세는 ‘하늘에서부터’ 허락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수님의 절대 순종”의 교차점이라고 해설한다. 하나님께서 악을 잠시 용납하실지라도,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시는 섭리가 있으며, 예수님은 인간 편에서 어떤 무고와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우리의 신앙이 열심히 넘쳐나는 것 같으나, 실제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었고, ‘메시아를 고대한다’고 말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가장 혹독히 핍박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비슷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형식이나 전통에는 매우 엄격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마음과 진리,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핵심을 외면한다면, 종교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는 위선의 길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예수님의 대속적 순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겉으론 ‘정결’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다. 예수님은 그런 배후의 음모와 폭력을 알고도, 빌라도가 내민 타협의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대속을 완성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다. 아무리 위선과 거짓이 난무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거꾸러지지 않고 도리어 구원의 길을 열어젖히신다.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배척했던 모든 인간의 죄가 ‘종교적 열심’이라는 옷을 입을 때 얼마나 무섭게 변질될 수 있는가, 그 교훈을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새겨야 한다.
Ⅲ. 십자가의 길: 완전한 사랑과 구원의 열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소주제에서,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9장 16절까지 진행되는 이 모든 상황이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결정적 순간을 예고함을 주목한다.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넘겨주고,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니라”(요 19:16)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예수님은 가장 참혹한 형벌,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처절한 죽음의 방식으로 죽임당하시게 된다.
그런데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십자가가 곧 패배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가장 찬란한 승리”라는 역설로 해석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한낱 처절한 비극이 아니라, ‘새 생명’을 싹틔우는 구원의 씨앗이 됨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적 방식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것이라 여겨지던 십자가로 죽으신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는 단지 고통의 상징이나, 예수님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말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의 손에 의해 죄인의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그분의 피가 곧 ‘우리의 죗값’을 대속한다. 구약의 예표적 제사 제도가 수많은 짐승의 피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던 죄 문제가, 참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으로 영원히 해결된 것이다(히 10:10).
또한 빌라도가 “예수를 채찍질하였다”는 것은, 십자가형 집행 전에 로마 군병들이 죄수에게 가하는 극심한 태형(笞刑)이었다. 납조각이나 뼛조각이 붙은 채찍으로 때려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투성이가 되는 비인간적 형벌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서 이미 채찍질로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리신 뒤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분이 받으신 고통은 상상조차 힘들 정도”라고 묵상한다. 이런 처절한 고통을 예수님께서 기꺼이 감내하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죄의 형벌을 대신 지시려는 ‘자발적 선택’이었다. 십자가는 로마의 잔혹성, 유대인들의 악의, 온 인류의 죄악이 합쳐진 최악의 폭력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헌신적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자리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각자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공의(公義)란 죄를 심판해야 옳다는 원리다. 사랑이란 죄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원리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가 공의를 따라 심판받는다면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되고,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히 실현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는 바울의 선언이 바로 이것을 요약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실패나 절망이 아니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요 12:16)로 해석된다. 제자들은 십자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이 모든 일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고 나서야, “아, 이 모든 것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었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혹은 성찬식 등에서 이 본문을 묵상할 때, “고통스럽고 처절한 장면일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는지 더 깊이 깨닫도록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자세는, 첫째로 ‘타협 없이 끝까지 순종하시는 용기’이고, 둘째로 ‘어떤 폭력과 거짓에도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감당하시는 인내’이다. 그리고 셋째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절대적 신뢰’이다.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않았더라면 빌라도가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었다”고 하심으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믿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도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핍박이나 박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 “세상 권세를 통해 억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끝까지 진리와 사랑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악한 이들이 음모를 꾸밀 수 있고, 잘못된 지도자들이 진리를 훼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붙드는 자들은, 마치 빌라도의 군병들이 아무리 때리고 조롱해도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거룩함을 빼앗아 가지 못했듯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한 알의 밀”의 죽음이 “수많은 열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증한다(요 12:24).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역사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본다.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 그리고 온 인류가 힘을 합쳐 예수님을 배척하고 처형했지만, 오히려 그분은 부활을 통해 사망을 깨뜨리셨고, 그 희생 덕분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수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땅에서 들리신” 그 십자가는 ‘만민을 내게로 이끌겠다’(요 12:32)는 신적 선언의 성취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대속의 신비”라고 일컬으며,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남았을 것이라 말한다. 또한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로마의 잔인한 정치적 폭력, 백성들의 무지와 증오 속에서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받으시고 영광 가운데 부활하셨다.
이로써 세 번째 소주제 “십자가의 길: 완전한 사랑과 구원의 열매”를 마무리하자면,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죄가 집약된 폭력과 부조리의 자리였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거룩한 희생 제단’이었다. 예수님은 철저히 낮아지셨고, 우리는 그 낮아지심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의 심판에서 패배하신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길이 ‘하나님의 절대 승리’였다.
장재형목사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유대 지도자들처럼 종교적 형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인지 스스로 돌아보라”고 촉구한다. 우리에게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세상 권세나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우선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영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예수님 심문 장면(요 18:28~19:16)은, 전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실체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죄를 예수님이 어떠한 자세로 짊어지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가장 처절한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것은 ‘자발적 순종’이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사랑이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통해 전해지고, 수많은 영혼이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지상의 모든 시련과 배신과 고통을 넘어,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영광”임을 우리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실천적 신앙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욕설을 참으시고, 모멸을 감수하시고, 극심한 폭력까지 인내하신 이유는, 결국 그 길이 ‘죄인에게 가장 확실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이 사랑을 계속 실천한다면, 교회는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외형적이고 제도적인 것에 매몰되어 혹여 주님을 배척하는 우(愚)를 범하기보다는, 언제나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길을 걷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는 이들의 마땅한 자세다.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사건은, 빌라도를 통한 세상 법정의 무죄 판결(“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거부하고 세상의 권세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것은 종교적 위선과 미움이 결합된 죄악의 절정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과 완전한 사랑을 통해 구속사(救贖史)가 절정에 이르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라바가 은혜로 풀려나듯, 우리도 십자가 은혜로 풀려났음을 잊지 말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 어떤 고난도 불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의 음모와 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뒤바꾸시며,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다.
이상 세 소주제로 살펴본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에 대한 해설에서, 장재형목사는 특히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그리고 궁극적 십자가가 가진 대속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에게 강력한 도전이 되며,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도 여전히 회개와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처럼 끝까지 진리를 증언하는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기득권을 지키고자 예수님을 배척하고 가이사에게 머리를 숙이는 길을 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2000년 전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세상이 던지는 많은 유혹과 위협 앞에서 “진리에 속한 자”로서 흔들림 없는 신앙의 길, 곧 십자가를 중심에 둔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며, 온 세상을 향해 참된 복음의 증언이 이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군병들의 조롱 앞에서도, 대제사장들의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셨고, 그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승리”임을 온 우주가 확인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