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목욕한 자와 죄의 먼지, 장재형목사

사순절의 정적 속을 조용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요한복음 13장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게 된다. 이 장은 그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문단이 아니라, 사랑과 배반, 빛과 어둠, 영광과 수치가 한 점에 수렴되는 영적 심연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특히 두 표현을 반복해 붙잡는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선언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는 말씀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비극의 문턱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맞이하신 죽음은 단순한 자연사(死)가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 가해진 폭력적 죽임(殺)이다. 그러나 이 가장 어두운 수난의 문 앞에서조차, 주님은 자기 연민이나 분노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을 선택하신다. 이 ‘끝까지’라는 말에 사순절의 전율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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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려 보자. 그림 중앙에는 고요한 예수의 얼굴이 있고, 그 양옆으로 제자들이 놀라고, 수군거리고, 서로에게 묻고, 손짓하며 소란스럽다. 각자의 이해관계와 감정에 흩어진 얼굴들 사이에서, 배반의 공기가 서서히 농도를 더해간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설립)목사가 그려내는 실제 역사의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주입했고, 그와 동시에 제자들 안에는 누가 더 큰가를 다투는 은밀한 경쟁심이 꿈틀거렸다. 원수가 거룩한 식탁에 함께 앉아 떡을 떼고, 예수님을 팔아 넘길 자가 ‘성찬의 자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장면은, 다 빈치의 붓을 넘어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 본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극적 무대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자리, 비극의 극치가 다가오는 바로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관점에서 읽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숙명을 체념한 수동적 죽음이 아니다. 이는 음모와 종교 권력, 군중의 무지와 제자의 배반이 뒤엉켜 만들어낸 ‘죽임’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서 주님은 자신에게 가해질 잔혹한 운명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일에 전 존재를 쏟아붓는다. 이 집요하고도 우직한 사랑의 긴장이 사순절의 공기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요한복음은 “마귀가 벌써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기록한다. 제자와 주님을 갈라놓는 생각, 결코 제자의 가슴에 있어서는 안 될 상상이 어느 날 조용히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신앙의 가장 치명적인 위기는 언제나 외부로부터의 박해가 아니라,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자의 내면에서 은밀히 자라나는 배반의 씨앗에서 비롯된다. 유다는 주님의 곁에서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목격했고, 떡과 잔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마귀가 뿌려 넣는 생각을 분별하지 못했고, 그 생각을 성령의 빛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지도 않았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1장의 무서운 표현, “내어버려두사”를 소환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붙드시는 은혜와, 반복적인 거절과 고집 속에서 끝내 “내어버려두시는” 심판 사이에는, 문 안과 문 밖을 가르는 문지방만큼, 집 안과 집 밖을 나누는 문턱만큼이나 극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유다는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사랑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마침내 스스로 내어버려짐의 밤 속을 향해 걸어 들어간 사람이다. 요한이 “조각을 받은 후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기록할 때, 그 한 줄의 문장은 단순한 시간 정보가 아니라, 영혼 전체를 뒤덮는 어둠의 밀도를 상징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서 모든 악기가 갑자기 낮게 가라앉고, 긴 침묵과 같은 정적이 흐르는 순간이 있다. 그 적막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배반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동시에 느끼게 된다.

더욱 섬뜩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유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갈 때, 그 곁에 앉아 있던 다른 제자들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유다가 나가는지,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진행 중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제자들의 사랑의 둔감함, 형제에 대한 무관심, 영적 감수성의 마비로 진단한다. 최후의 만찬의 현장을 역광선으로 비추어 보면, 한쪽에서는 떡을 떼며 마지막까지 배반자를 권면하고 붙드시는 주님의 처절한 사랑이 드러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로 다투고, 바로 옆 자리에 앉은 형제의 영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정한 제자들의 모습이 고발된다. 사순절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예리하게 묻는다. “너는 유다와 같은 자인가?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모른 척한 제자와 같은 자인가? 아니면 유다를 끝까지 붙드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자인가?”

이 심각한 긴장과 영적 둔감의 공기가 짙게 드리운 순간, 예수께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신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채우신 뒤,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기기 시작하신다. 팔레스타인의 거칠고 비포장된 길을 샌들을 신고 오가던 사람들에게, 집에 들어서며 발을 씻는 행위는 일상의 기본 예절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담당하는 이는 늘 종이었다. 간혹 라비의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기도 했으나, 어느 경우든 발을 씻기는 자는 ‘아래’에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말씀하신 그분이, 스스로 겉옷을 벗어 종의 자리에 앉으신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제스처가 아니라, 세상의 권위 구조와 가치 체계를 송두리째 전복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권위는 위에서 누르는 일이 아니라 아래에서 떠받치는 섬김이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내뱉은 고백은 인간적 정서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깊은 오해를 내포한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겸손처럼 들리지만,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베드로의 무지를 읽어낸다. 예수께서는 이미 공생애 내내 제자들의 ‘발’을 씻어오셨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길 잃은 자를 찾아 나서신 모든 행위가 곧 제자들의 삶과 존재를 씻기시는 사랑의 섬김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랑의 연속성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단 한 번의 행위만을 보고 흠칫 물러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는 말씀으로 그의 좁은 이해를 넘어서는 더 깊은 세계를 예고하신다. 이 말에는 제자 된 자의 한계를 지적하는 냉엄함과 동시에, 그 한계를 언젠가 넘어 설 수 있으리라는 주님의 신뢰와 소망이 함께 담겨 있다.

이어지는 말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선언은,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소속, 관계의 본질을 겨냥한다. 장재형목사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배경을 짚어 주며 이 말을 해설한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집을 나서기 전에 이미 온몸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잔칫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먼지와 흙탕물이 다시 발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집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고, 발만 씻으면 충분했다. 예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중생과 일상적 회개’라는 영적 구조로 해석한다. 목욕은 단 한 번이다. 한 번의 철저한 중생, 성령 안에서의 새 탄생, 십자가 앞에서의 존재론적 단절이 그것이다. 세례의 물 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는 행위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상징한다. 어떤 랍비가 “개종자는 어머니와도 결혼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했을 정도로, 세례와 중생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철저한 정체성의 전환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예를 통해, 중생이 감성의 변화나 종교적 취향의 이동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근본적 전환임을 강조한다. 한 번의 목욕, 한 번의 철저한 항복, 한 번의 십자가 앞에서의 무너짐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 잔치의 손님으로 초대하는 관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이 문제다. 이미 목욕한 자도 여전히 먼지 쌓인 길을 걸어야 한다. 십자가와 성령의 세례 안에서 원죄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지만, 자범죄, 곧 살아가면서 발로 쫓아가 저지르는 죄는 여전히 우리를 더럽힌다. 바울이 “그 발이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탄식할 때, 그는 인간이 죄를 향해 얼마나 재빠르게 달려가는지, 우리 존재 깊이 새겨진 죄의 습관성을 폭로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냉엄한 현실을 숨기지 않고 직면하게 한다. 우리는 거듭난 자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죄짓기에 빠른 발을 가진 존재다. 그렇기에 사순절의 초대는 “다시 목욕하라”가 아니라, “이미 목욕한 자답게, 날마다 발을 씻으라”는 영적 명령이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체적인 회개요 정결 예식이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일지라도, 죄를 범한 후에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더럽혀진 발을 내밀어야 한다. 내 발이 어디를 다녔는지, 어떤 피와 먼지를 묻히고 살아왔는지, 감추지 말고 보여드려야 한다. 그때 예수께서는 다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의 발을 씻기신다. 우리는 회개를 수치로 여기지만,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기쁨으로 맞으신다. 어린아이가 옷을 더럽힐 때마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고 또 하면서도 결국 아이를 끝까지 깨끗하게 입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죄로 얼룩질 때마다 우리의 발을 씻기신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발 씻김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반복되는 자비의 경험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십자가의 위치를 다시 강조한다. 교회는 간판이 있어야 한다. 유월절 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의 운명이 갈렸던 것처럼,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공간들과 구별되는 표지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간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회의 중심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예배당 천장에 걸린 나무 십자가만이 아니라, 각 성도의 가슴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십자가’까지 포함한다. 십자가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상징이다.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곳에서는 죄가 편안히 눕지 못하며, 자기합리화와 교만이 뿌리 내릴 여지가 사라진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이 불편한 십자가를 피해 가고자 할 때마다 다른 종교적 대체물을 만들어냈다. 할례, 의식, 관습, 성공과 번영이라는 언어로 십자가의 거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려고 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흐름을 “다른 복음”이라고 단호하게 규정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세기를 넘어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이유는, 화려한 음악적 기교 때문만이 아니다. 장엄한 합창과 섬세한 선율을 타고 흐르는 중심축이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은 결국 골고다 언덕의 침묵 앞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십자가 앞에서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고, 오직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붙드는 자만이 남는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로 요약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과 요한복음 13장의 발 씻김 사건을 서로 포개어 읽는다. 주님은 왕 중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종 중의 종이 되셨다. 진정으로 비워질 때 비로소 충만해지고, 진정으로 낮아질 때 참으로 높아진다는 역설이 여기서 구체적인 몸짓으로 드러난다. 세상의 권력은 위에서 아래를 눌러 지배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아래에서 섬기며 떠받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녀를 품고 키우는 어머니가 사실상 자녀의 종으로 살아가듯, 교회의 진정한 권위도 형제의 발을 씻기는 자리에서 형성된다.

이 대조의 한편에 유다가 서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청받았다. 어떤 자격도 없었지만,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떡과 잔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목욕하지 않은 자’였다. 사랑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중생의 세계가 그의 내면에 열리지 않았고,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사랑의 강물 위에 떠 있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의 물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 은혜의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그것이 은혜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이에 비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전혀 다른 장면을 펼쳐 보인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렸을 때, 아버지는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 안는다. 사랑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허락된다. 유다에게도 그 길은 열려 있었다.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강조하듯, 예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 붙드려 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그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밤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선택했다.

오늘 사순절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는 동일한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이미 목욕한 자로서, 날마다 발을 씻으며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자인가. 아니면 유다처럼, 아직 목욕하지 않은 채 단지 종교적 자리에 동석하는 데에만 만족하는 자인가. 혹은 제자들처럼, 가장 깊은 비극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서로의 발을 씻기기는커녕, 누가 더 큰가를 다투는 데 몰두하는 자인가.

장재형목사는 이 설교에서, 사순절 40일이 단지 교회력의 한 구간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배열을 재구성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발을 씻기며 보여주신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정욕과 욕심,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십자가가 가슴 한가운데 깊이 박혀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죄를 달콤한 유혹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죄를 향해 달려가던 발이 어느 순간, 발등 위에 드리워진 십자가의 그림자를 보고 멈추게 된다.

이 설교는 또한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라”는 주님의 명령을 잊지 말라고 촉구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씻기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자매의 발을 씻겨야 한다.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겸손 동작이 아니라, 실제로 용서하고, 기다리고, 품고, 돌보는 사랑의 노동이다. 나를 십자가의 길로 내몰았다고 느껴지는 원수 같은 사람, 나를 오해하고 비방하고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고도 가장 복된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바흐의 수난 음악들이 끝내 절망이 아니라 소망의 빛을 머금고 마무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십자가는 비극의 절정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을 지나 부활절을 향해 나아가는 이 여정 한가운데에서, 장재형목사의 이 설교는 우리에게 분명한 결단을 요구한다. 이미 목욕한 자답게 살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더러운 옛 옷을 부둥켜안고 살 것인가. 날마다 발을 씻으며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할 것인가, 아니면 더러워진 발을 감추고 자신을 속일 것인가. 형제의 발을 씻기는 종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누가 더 큰가를 따지는 세상의 논리 안에 머물 것인가.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식탁과 예배 자리, 일상의 가장 평범한 공간 속으로 찾아오셔서 조용히 겉옷을 벗으신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는 확고한 위로와 동시에 떨리는 도전이 함께 담겨 있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씻김 받은 자들이지만, 여전히 먼지와 피를 묻힌 발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사순절은 이 발을 주님께 내어놓는 시간이며, 그 씻김을 힘입어 다시 일어나 다른 이들의 발을 씻으러 나아가는 시간이다.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유다를 향해서조차 끝까지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갈 때,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부활의 새벽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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