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바울의 사도행전 22장 복음 전략

사도행전 21장의 막은 성전 층대 위에 선 바울과 그를 죽이려는 군중이 정면으로 마주 선 장면에서 내린다.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바울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한다. 로마 군인의 손에 붙잡힌 채 헬라어로 맞대응하지 않고, 히브리 방언, 곧 아람어로 조용히 말문을 연다. “부형들아.” 칼날 같은 시선이 오가는 와중에 이 다정한 호칭은 군중의 심장부를 직접 건드린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갈아엎는 영적 경작으로 읽는다. 말의 코드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그 한마디가 분노의 장벽을 낮추고 “히브리 방언을 듣자 더욱 조용해졌다”는 사도행전 22장 2절의 기록처럼, 바울이 진리의 씨앗을 심을 침묵의 공간을 확보하게 한다. 헬라어에 익숙한 디아스포라 엘리트들의 혐오와 오해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면, 정보의 언어가 아니라 기억의 언어, 거래의 언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가 필요했다. 바울은 그 정확한 지점을 찔렀다.

침묵이 마련되자 그는 정서적 공감 위에 치밀한 논리의 다리를 놓는다. 다소 출신이라는 사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란 엄격한 바리새인이었다는 이력, 율법에 대한 열심과 교육으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는 자기소개는 과거 자랑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설득을 위한 에토스 구축이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의 이 고백을 법정 진술의 머리말처럼 읽는다. 그는 “나 역시 너희의 전통과 열심을 충분히 알고, 그 안에서 자라나 열심을 다했던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세운 뒤, 그 공통분모에서 출발해 새로운 결론으로 청중을 이끈다.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언급은 상징을 더 깊게 만든다. 야곱의 축복에서‘이리’로 표상된 베냐민의 기질이 회심 이전에는 교회를 물어뜯는 폭력의 에너지로 폭주했지만, 회심 이후에는 복음을 위해 어떤 고난도 돌파하는 불굴의 추진력으로 전환되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혈통과 기질, 지식과 경력, 심지어 시민적 지위까지도 새로 빚어 당신의 선한 도구로 쓰신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은혜는 과거를 지워버리는 망각이 아니라, 과거를 전환시켜 목적을 새로 부여하는 창조적 재배치다.

바울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가 서 있던 무대의 역학을 살펴봐야 한다. 로마의 지배 아래 유대 사회는 거칠게 말해 네 흐름으로 흘렀다. 성전 권력과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누리던 사두개파, 무력 항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려던 열심당, 광야의 공동체에서 경건과 분리를 추구하던 에세네파, 그리고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려던 바리새파다. 바울은 마지막 전통의 핵심부에 있었다. 그는 군중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로 시작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끄는 설득의 경로를 설계할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형도를 배경에 깔고 바울의 언어 선택을 읽어낸다.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로 말해야 마음이 열린다. “내가 바뀌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기다려 온 의가 이렇게 성취되었다”라는 방향 제시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의 치부를 덮지 않는다. 그는 가장 어두운 방부터 먼저 켠다. “나는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증인의 옷을 지키던 젊은 사울,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을 향해 살기등등하게 달리던 그 자신을 숨김없이 내어놓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도덕적 반성문이 아니라 복음의 심장으로 해석한다. 가장 깊은 죄의 자리에 임하시는 은혜만이 사람을 밑바닥에서부터 바꾼다. 가장 극렬한 박해자가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된다는 역전은, 인간의 노력이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구원의 출발점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바울의 과거는 흠결이 아니라 은혜의 깊이를 보여 주는 투명한 창이다.

전환은 빛과 함께 온다. 한낮의 태양보다 더 밝은 광휘가 그를 둘러쌀 때, 그는 땅에서 시선을 잃는다. 이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다. 율법의 의를 세우려 달리던 그가 그 영광 앞에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눈멂이 신명기의 경고를 상기시킨다고 설명한다.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 임하는 혼미와 눈멂의 저주가, 아이러니하게도 율법에 가장 열심이던 바울에게 닥친 것이다. 곧 인간이 스스로 의를 세우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한계를 그는 몸으로 통과한다. 사흘의 어둠은 그의 세계관과 가치 체계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는 하나님의 수술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들린 음성은 단호하면서도 자비로웠다. “사울아, 사울아.” 그는 이름으로 불림 받았다. 그 부르심 안에서 과거의 에너지와 현재의 고통, 미래의 사명이 한 점으로 모인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제자를 준비하셨다. 어제까지의 원수를 “형제 사울”이라 부르며 다가간 아나니아의 손길은 복음이 두려움과 편견을 녹이는 능력을 보여 준다.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는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으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예정과 소명, 칭의와 성화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역동을 본다.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 정하셨다”(롬 8:29)는 선언은, 역사 속 사람과 장소와 시간 속에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은혜는 개념이 아니라 관계이고,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사명이다. 바울이 곧장 순종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은 거듭남이 단지 내적 체험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동반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님은 그를 예루살렘 성전으로도 이끄셨다. 그곳에서 바울은 떠나라는 명령을 듣는다. 사람들이 그의 증언을 받지 않을 것이니,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이 한 문장이 광장을 다시 자극한다. 잠잠하던 분노가 폭발하고, 사람들은 옷을 던지고 티끌을 날리며 그를 죽이라고 외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역설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거룩을 지키겠다며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 성전은 더 이상 거룩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의 로마 군대에 의해 법과 질서가 유지된다. 혈통과 형식주의가 거룩을 대체하면, 하나님은 바깥에서 정의의 도구를 들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에베소서 1장 10절의 총괄, 곧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려는 계획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통해 한 걸음씩 전개된다.

그때 또 하나의 급전이 일어난다. 채찍질 직전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밝힌 것이다. 재판도 없이 시민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중대한 위법이었기에, 천부장과 군사들은 두려워 물러선다. 한 관리가 “큰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다”고 말할 때,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 시민”이라고 응수한다. 이것이 비겁한 자기보호였는가. 장재형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권리를 방패로만 쓰지 않고, 복음이 로마의 심장부까지 들어갈 전략적 사다리로 사용했다. 신분과 제도와 법과 권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복음의 길을 여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권리의 행사는 개인의 안위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확장이라는 더 큰 목적에 복무할 때 거룩해진다. 여기서 신앙의 순결은 순진함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선을 이루려면 현실을 알아야 하고, 법을 이해해야 하며, 공적 질서 속에서 정직하게 권리를 행사할 줄 알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거룩한 현실감”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장면을 수사학의 관점에서 비춰 보면, 바울의 연설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가 균형을 이룬 보기 드문 사례다. 에토스는 그의 삶 전체에서 나오고, 파토스는 죄의 고백과 다메섹 체험의 생생함에서 흘러나오며, 로고스는 성경과 역사적 사실을 엮는 탄탄한 논리에서 형성된다. 하나라도 무너지면 메시지는 힘을 잃는다. 에토스 없는 로고스는 차갑고, 로고스 없는 파토스는 가볍다. 반대로 인격과 감정과 이성이 서로를 지지할 때, 말은 설득을 넘어 변화를 일으킨다. 바울의 히브리 방언 선택은 언어학적으로는 코드 스위칭의 서사적 전범으로 읽을 수 있다. 공동체의 기억과 수치, 자부심과 상흔을 실어 나르는 모국어의 정서 자산을 호출함으로써, 그는 분노를 경계로 몰아붙이지 않고 공통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소통이 효율과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와 관계의 문제임을 환기한다. 관계가 회복되면 진리가 들린다.

현대의 공론장에서도 원리는 같다. 다문화 도시의 지하철,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교실과 병원과 공장, 감정이 과열된 디지털 댓글창에서 우리는 먼저 듣고, 그다음에 말해야 한다. 상대의 “부형들아”를 찾아내는 귀, 그 언어를 존중해 건네는 첫마디가 결정적이다. 간증은 자기 미화가 아니라 은혜의 성실함을 드러내는 통로여야 한다. 무엇보다 각자의 시민권과 직업적 권한, 네트워크와 기술을 복음의 통로로 삼아야 한다. 연구자는 연구로, 예술가는 작품으로, 법조인은 법률로, 공직자는 정책으로 공공선을 세우며 복음의 여백을 연다. 사실 확인과 공손한 말투, 투명한 출처 표기는 디지털 광장에서 신뢰 자본을 축적하는 기본기다. 바울이 성전 층대에서 보여 준 것처럼, 복음의 말은 상황을 통과하며 깊어진다. 증인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득력을 얻는다.

이 길의 신학적 밑그림은 로마서 9장과 8장, 에베소서 1장에서 조명된다. 사람의 뜻이나 노력으로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한다는 선언은 바울 자신의 생애에서 실물 교육이 되었다. 그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심지어 교회를 해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오셨다.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약속은 다메섹의 빛과 아나니아의 손길, 예루살렘의 폭발과 로마의 질서라는 구체적 사건들 안에서 현실이 되었다. 선택의 확신은 배타로 흐르지 않는다. 내가 값없이 받았기에, 나는 값없이 나누는 사람으로 변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복음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제국의 수도로 향했다. 에베소서의 총괄은 교회가 현실 회피가 아니라 현실 관통을 통해 이뤄 가야 할 비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바울의 모든 배경은 우연이 아니다. 다소에서 이중언어 환경을 익힌 것, 가말리엘에게서 공적 토론의 규범을 배운 것, 베냐민의 기질로 불의를 보면 일어서는 성품을 지닌 것, 로마 시민권이라는 법적 지위를 타고난 것, 모두가 복음의 길을 닦는 준비였다. 회심은 이 요소들을 지워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새로 통합하는 사건이다. 과거의 힘이 은혜 안에서 새 질서를 얻을 때 사람은 온전히 쓰임 받는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실천적 적용을 이끌어 낸다. 우리의 학문과 직업, 국적과 네트워크, 실패와 상처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복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교회는 신학적 정확성만이 아니라 시민적 지혜, 문화적 감수성, 관계적 성실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진리는 삶에서 아름다움을 얻고, 삶은 진리에서 방향을 얻는다.

마침내 사도행전 22장은 한 개인의 드라마를 넘어 교회의 길을 비춘다. 폭발 직전의 광장과 흔들리는 층대, 한 문장으로 달라지는 군중의 호흡, 권리를 행사하는 침착한 목소리, 그리고 제국의 법 아래에서 열리는 복음의 진군로가 하나의 서사로 엮인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민족과 제국의 역사를 관통하신다. 그날 바울의 입에서 흘러나온 히브리 방언은 과거의 언어였지만 미래를 여는 비밀번호였다. 베냐민의 ‘이리’는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고 복음의 장애물을 물어뜯어 길을 냈다. 로마 시민권은 특권의 증표가 아니라 복음의 거룻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창세 전에 시작된 사랑의 계획, 곧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모으려는 하나님의 총괄 속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남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나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내 권리를 사용하는가. 나는 과거의 상처와 기질을 어떻게 복음의 유익으로 전환하고 있는가. 이 세 물음에 대한 성실한 대답이 쌓일 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바울이 되어, 우리 시대의 로마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갈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해설은 우리를 그 장면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고, 말의 선택과 삶의 일치, 은혜와 책임의 경계를 차분히 더듬게 만든다. 말은 그렇게 사람이 되고, 사람은 그렇게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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