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읽다 보면, 로마서 1장 1절이라는 짧은 문장이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내면 전체를 압축한 신앙 선언임을 실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따로 세움을 입었느니라.”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한 절 속에 담긴 영적 구조를 하나씩 풀어내며, 고대 교회에서 울리던 메시지가 오늘 우리의 정체성 문제와 어떻게 교차하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그의 해석을 듣고 있으면, 로마서가 단순한 성경 연구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깊숙이 끌고 들어간다.
무엇보다 그는 로마서를 “교리서”가 아닌 “편지”로 다시 읽도록 제안한다. 차갑게 정리된 논문이 아니라, 바울이 심장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확신을 숨 돌릴 틈 없이 적어 내려간 생생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로마서를 감상하는 방식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마치 캔버스를 치밀하게 다듬은 완성작보다, 한 순간의 강렬한 영감이 쏟아져 들어간 스케치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카라바조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떨어지는 사울을 거칠게 묘사하며 빛의 충격을 그대로 담아냈듯, 바울의 글에도 삶의 흔적과 떨림이 그대로 배어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그 생생한 숨결을 붙들어 오늘 우리의 귀에도 바울의 음성이 들리게 한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만든 동력은 선교적 열망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까지, 더 나아가 서바나(오늘날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당시 세계 질서의 중심이 로마였고, 헬라 철학의 심장이 아덴이었으며, 유대 신앙의 뿌리가 예루살렘이었다면,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그 중심부에 복음을 옮겨 심는 데 있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께서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바울의 내면 일기처럼 풀어낸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쳤던 자리로, 바울은 복음을 들고 기꺼이 가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길이 펼쳐졌다. 바울은 로마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해야 할 연보 때문에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유대 지도자들과 여전히 경계심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고,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는 예감도 강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를 “죽음을 앞둔 사도”의 편지처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글 속에 복음, 율법, 은혜, 신앙, 선교, 인간 존재에 대한 사도적 통찰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해석을 들으면 자연스레 미술 작품 하나가 떠오른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사울의 회심」에서, 말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고 있고, 바울은 눈을 감은 채 그 빛 아래 무너져 있다. 그의 인생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장면이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이 장면 이후의 바울이 어떻게 자신을 다시 정의했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바로 그 자기 이해가 로마서 1장 1절에 응축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을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부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어 ‘둘로스’가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에 완전히 속한 존재를 뜻한다고 강조한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종은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없었다. 바울은 그 단어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주님이 먼저이고, 나는 그 뒤에 선다는 뜻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내 존재의 기원과 의미는 나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립한다”는 고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먼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분이었다. 하늘의 주가 스스로 낮아지셨기에, 바울 역시 사랑 때문에 종이 된 것이다. 그는 억지로 끌려간 노예가 아니라 사랑에 사로잡혀 자신을 내어드린 자유한 종이다. 고린도전서의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고백을 통해 바울은 ‘섬김의 자유’라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 준다.
그의 이름 선택도 중요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히브리식 이름 사울은 왕의 이름이자 ‘간구하다’는 뜻이 있었지만, 회심 이후 그가 사용한 헬라식 이름 ‘파울로스’는 “작은 자”라는 의미였다. 이는 종교개혁자 루터가 로마서 앞에서 무릎을 꿇고도 복음 앞에서는 스스로 작은 존재임을 인정했던 모습과도 겹친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본질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기억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이 흐름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도 발견된다. 방황을 끝내고 회심한 후 그는 자신의 학문과 명성을 앞세우지 않고, 은혜에 사로잡힌 ‘작은 자’로 남았다. 보티첼리의 「서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시각적으로 잘 담아낸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런 인물들과 함께 로마서가 역사 속 수많은 영혼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음을 상기시킨다. 루터도, 웨슬리도, 결정적 순간에 로마서 앞에서 마음이 불타오르는 경험을 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 부른다. ‘아포스톨로스’란 단어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자’를 넘어 왕의 권위를 위임받아 파송된 특사를 의미했다. “종”이라는 말이 존재의 근원을 규정한다면, “사도”라는 칭호는 존재의 방향과 역할을 규정하는 단어다. 나는 작은 자이지만, 동시에 하늘 왕의 권위를 위임받은 자. 아무것도 내 것이 없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 이 긴장 속에 바울의 정체성이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올리려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적절하다. 무릎을 꿇고 빈손으로 돌아온 아들은 초라하지만, 아버지의 손이 그를 덮는 순간 그는 다시 상속자가 된다. 바울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작은 자이지만, 그분의 손이 그를 붙잡기에 사도의 권위를 지닌다. 로마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 두 손의 무게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어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을 위해 따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르심의 신비를 계속 강조한다. 신앙의 본질은 자기가 하는 선택보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은 자신이 한때 스데반의 죽음을 지지했던 죄인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렘브란트가 「스테파노의 순교」에 자신을 몰래 그려 넣어 방관자적 죄책을 표현했듯, 바울은 과거의 어둠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다메섹 길 위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불러내는 초대였다.
회심 장면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은 아나니아다. 이름 없는 제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바울에게 보내어 영적인 연결고리가 되게 하셨다. 이후에는 바나바가 나타나 바울을 공동체와 연결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부르심 역시 이런 보이지 않는 영적 망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수많은 손길, 중보, 환대가 한 사람의 사명을 세우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마지막 표현에 모인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장재형 목사는 복음을 “우주적 승전보”라고 해석한다. 고대 전령이 승리 소식을 들고 달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고, 우리는 그 전령들이다. 패배하면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던 도시가 승전보 한 마디로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복음은 인류를 해방시키는 소식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향해 조용히 화살을 돌린다. 우리는 직업이나 성취로 자신을 규정하려 하지만,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이며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삶 전체를 재정의한다. 로마서 8장의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흐름 속에서 그는 자기 인생의 모든 서사를 하나님의 손 안에 둔다.
그는 또한 “구별됨”의 가치를 강조한다. 바리새인의 분리됨이 율법적 우월감이었다면, 바울의 구별은 복음을 위한 거룩한 헌신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드린 시간이 “거룩한 낭비”였다면, 로마서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다시 쓰는 일 역시 그런 낭비일 수 있다. 역사는 이런 낭비를 통해 움직였다. 루터가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며 유럽을 흔들었고, 웨슬리는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다.
오늘 우리에게도 로마서는 여전히 거울이다. 카라바조의 빛이 사울의 눈을 열어 준 것처럼, 말씀은 우리 삶을 비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세상은 직업, 재능, 재산을 답으로 내놓지만, 로마서 1장 1절은 다른 대답을 준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 복음을 위해 따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이 정체성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질 때, 일상과 기도, 관계와 사명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바로 그 변화를 준비시키는 영적 훈련장이 된다. 역사 속 명화가 한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화폭에 담아냈듯, 로마서 1장 1절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과정을 한 문장에 응축해 놓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