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서 3장 25절의 의미와 구속의 신비
로마서 3장 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는 기독교 신학이 오랜 세월 동안 논쟁하고 숙고해 온 구속(속죄)의 핵심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흘림을 통해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어느 날 갈보리 언덕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오늘날 나의 죄를 어떻게 사하고 정결케 하는 능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신앙인에게조차 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비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의문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정확히 측량하기 힘든 ‘구속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의 구속 교리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한순간에 씻어내는 초월적이고도 영원한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죄까지도 덮어 주셨다는 가르침은 표면적으로는 다소 비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며, 그 은혜가 바로 인간의 지성과 감정을 뛰어넘어 역사한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혈’에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잠시 유보된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의(義)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진노’가 모순된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향한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심판의 형벌을 죄인이 아닌 예수께서 스스로 받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곧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 Theory)의 기초가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랑을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체험 안에서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도덕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이 설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 이야기가 우리를 깊은 감동 가운데 변화시킨다”는 주장도 신앙의 실제 경험을 설명하기에 유의미합니다. 동시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구속이론으로 불리는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 즉 고전적 구속이론(Classical Theory of Atonement)은 사단과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를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승리를 강조함으로써, 구속 사건이 우주적 규모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의 승리임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구속 교리에 대한 여러 시각은 각각의 초점을 다르게 맞추고 있지만,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이 복음의 진수를 전할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설파함과 동시에, 죄를 멸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풍성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의 진노”라고 일컬어지는 측면을 부정하기보다는, 성경이 분명히 진노와 심판을 언급하고 있음을 함께 직시하면서, 그 심판을 넘어서는 은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설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는 로마서 5장 9절과 10절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사실상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였음을 시사합니다. “원수”란 결코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적대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진노만을 쏟아 부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5절과 5장 9-10절에 드러난 복음의 핵심은, 이 원수 관계를 회복하여 ‘화목의 관계’로 만드는 주님의 희생, 그분의 피 흘리심을 통한 화해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진노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극적인 사건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서의 구원’이라는 주제가 자주 다루어집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진노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극단도, 반대로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진노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극단도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은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가 굴복되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도덕감화설), 죄에 대한 형벌이 실제로 대속되었다는 사실(형벌대속론)을 함께 바라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죄의 사슬이 끊어졌음(승리자 그리스도)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복음서는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이미 죄 용서를 선언하신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께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예수께서 신성모독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를 치료하실 뿐 아니라 죄를 사해주시는 권능을 보이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죄 용서의 권능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됩니다.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 예수의 공생애 동안 계속 보여주셨던 죄 사하심의 결정적 절정이 되었으며, 이후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력화됨이 선포된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다’는 표현은, 죄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스르는 것이며, 결국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을 때, 그 진노가 더 이상 우리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는 구속의 본질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어낼 수 없는 전적인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점을 강조할 때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지만, 동시에 그 진노를 스스로 감당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한없이 감사해야 한다”라고 설교합니다.
이렇듯 로마서 3장 25절은 바울의 신학 정수가 농축된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흘림의 효력이 우리에게 미치는 과정은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이 선언을 뒷받침합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 역시 ‘피 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 9:22)’라는 원리에 기초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모든 의식적 희생제사를 마침내 완성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전통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이천 년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오늘날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깨끗케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의 사건’이라는 관점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이를 설교할 때, 우리는 역사의 순간 속에서 시간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며(히 13:8),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효력을 발휘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건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누누이 말합니다.
- 세 가지 주요 구속(속죄) 이론과 그 신학적 함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분류하면, 첫째로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 둘째로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 Theory)’, 셋째로 ‘도덕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이라는 세 가지 유형이 대표적입니다. 이 세 이론 모두가 기독교 구속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며, 서로 다른 관점을 강조하지만 어느 하나가 전부를 대체하거나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십자가의 구속이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이해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장재형 목사도 이와 같은 통합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교회가 이 세 측면을 균형 있게 선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먼저,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는 가장 고전적인 구속이론으로서 ‘속전이론(Ransom Theory)’ 혹은 ‘극적구속론(Dramatic Theory of Atonement)’이라고도 불립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 이론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근간에 있었고, 따라서 ‘고전적 구속이론(Classical Theory)’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합니다. 그 핵심은 인간이 죄의 권세, 사단의 지배 아래 종노릇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속전(ransom)으로 지불하여 인간을 해방하셨다는 개념입니다. 곧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는 예수의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구해내셨다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주적 규모에서 벌어진 거대한 ‘영적 드라마’를 상정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에 빠진 인간이 사단의 포로가 되었고, 사단은 인간을 인질로 삼아 하나님께 요구를 하는 악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값 주고 사 오셨다’는 구도 안에서, 사단은 결정적으로 패배당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영원히 무너졌다는 것이 ‘승리자 그리스도’ 이론의 정수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관점을 설명할 때 “예수님의 죽음이 수동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그분이 스스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써 사단의 손에서 우리를 구출해내는 적극적인 해방 사역이었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 해방 사역이 바로 “우리의 죄의 사슬을 끊고, 죽음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생명과 소망으로 옮겨지는 은혜로운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두 번째 이론은 종교개혁자들과 정통주의 신학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 Theory)’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다”는 데 주안점을 두며, 다른 용어로는 ‘형벌대상설(刑罰代償設)’ 혹은 ‘배상만족설(賠償滿足設)’이라고도 불립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심판을 우리가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대리(Substitute)가 되어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배상(satisfaction)을 얻게 되었다는 주장이 바로 형벌대속론의 핵심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죄를 무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지만, 그 형벌을 죄인인 우리가 아니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형벌대속론이 “기독교 구원의 깊은 신비를 객관적이고도 법정적인 이미지로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실 때, 이는 인간이 빚진 형벌과 책임을 완전히 끝마쳤다는 선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대가, 곧 죄의 대가가 예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두 지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형벌대속’을 통해 죄인이 죄 값을 면제받고 의인으로 선언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내내 이 이론은 매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왔고, 실제로 많은 교회의 설교와 예배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메시지가 반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세 번째 이론인 ‘도덕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은 12세기경 피터 아벨라르(Peter Abelard)에 의해 체계적으로 제시된 후에, 근대와 현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이 이론은 십자가 사건이 인간의 마음에 엄청난 감화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을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궁극적 사랑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녹이고 깊은 회개와 변화를 일으키며, 그 결과 죄와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형벌대속론이 다소 “객관적”이고 “법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반면, 도덕감화설은 구원의 “주관적 체험”과 “내적 변화”에 더 초점을 둡니다.
도덕감화설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객관적인 구속 사역이 없으면, 단순히 감동만 받아서 인간이 거듭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반면에 감화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단지 법정적 선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히 체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답변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내면에 미치는 감동과 울림, 도덕적 감화가 곧 인간 영혼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장재형 목사는 이 세 이론을 단순히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각각이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며, 상호 보완적으로 십자가의 풍성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여주는 우주적 사건(Christus Victor)인 동시에, 죄에 대한 형벌을 완벽히 지불하신 대속적 희생(Penal Substitution)이자,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의 극치(Moral Influence)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 전통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묵상할 때 이 세 가지 차원을 각각 깨닫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한층 더 입체적이고 깊게 다가온다는 간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사 속에서도 특정 시대는 형벌대속론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부각했으며, 초대교회 시절에는 오히려 승리자 그리스도 개념이 더 일반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근대 이후에는 개인주의와 심리학적 접근이 발전하면서 도덕감화설이 강세를 보이는 양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돌아볼 때, 교회가 결코 어느 한 이론에만 고집하기보다, 복음의 핵심을 지키면서 상황과 시대가 가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시도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고백이, 사실은 한편으론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며, 다른 한편으론 죄에 대한 형벌이 대속되었다는 안도감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깨달음 속에서 변화되는 감동적 체험을 의미한다”고 설교합니다. 이는 곧 세 이론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한다는 간증입니다. 예배 자리에서 찬양과 말씀을 접하면서, 회개와 결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어찌 보면 도덕감화설이 말하는 “우리 마음 안의 변혁”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형벌이 끝났다’는 교리적 이해가 우리에게 평강을 줍니다. 그리고 선포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셨다”는 우주적 희망을 함께 보여줍니다.
결국 로마서 3장 25절이라는 짧은 구절 하나에도, 이처럼 풍성한 구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크리스천들에게 큰 깨달음이 됩니다. 바울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할 때,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사역을 한 단어로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다면적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승리, 우리가 대속받은 형벌,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일으키는 거룩한 감동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드러났으며, 그 사랑이 믿는 자를 영원히 자유케 한다”는 것이지요.
- 목회적 적용과 장재형 목사의 사역에서의 구속 신학
앞서 살펴본 세 가지 구속이론은 결코 추상적인 신학 논의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 교회 현장, 목회와 설교, 성도의 신앙생활 전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지 증거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이론이 제시하는 측면들을 균형 있게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형벌대속론이 분명하고 확실한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에 감동하여 회개와 결단에 이르는 사례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사단과 죽음에 대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자신의 삶도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용기를 얻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목회적 현장에서의 구속 신학 적용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는 설교와 강의에서, 구속 사건을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교리적 사실”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도 우리 삶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오늘의 사건”으로 선포합니다. 그가 “십자가 복음을 각 사람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그 안에는 도덕감화설적 요소가 분명히 작동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냉담하고 굳어 있는 죄인의 심령을 녹일 수 있다는 진리를 자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장재형 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형벌대속론”을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구속이 “법정적 의미에서의 형벌의 대속”이라는 확실한 토대가 없으면,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에 대한 형벌을 면하기 어렵지만, 예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복음의 결정적 핵심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설교 중에는 종종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실제로는 예수님이 당하신 처절한 고난 위에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성적인 호소가 아니라, 신학적 토대가 있는 선언이자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또한 그는 “승리자 그리스도” 관점 역시 성도들의 영적 전쟁을 이끌어 가는 데에 중요한 힘을 준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성도들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사단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내야 하며,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 승리에 동참하고 있다”는 인식은 신앙인의 삶에 큰 담대함과 소망을 부여해 줍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종종 “우리의 삶에 드리워진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사단이 심어주는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승리자 그리스도’ 신앙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은 종종 “구원을 확신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죄책감과 불안, 정죄감에 짓눌릴 때가 많습니다. 이때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죄가 비누로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를 씻어낸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이것은 곧 형벌대속론의 강조점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깊이 묵상하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도덕감화설이 말하는 ‘내적 감화’를 위한 실제적인 안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종 되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승리자 그리스도 개념이 설명하는 해방감과도 이어집니다.
이러한 통합적 구속 이해는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특정 이론만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신자들이 편협한 이해에 머물 위험이 생기곤 했습니다. 예컨대, 형벌대속론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을 “잔혹한 심판자”로 왜곡할 수도 있으며, 도덕감화설만 집착하면 십자가의 객관적 속죄가 희미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만 앞세우면, 십자가 사건의 ‘영적 전쟁’ 측면만 강조하다가 개인 죄의 용서와 내적 변화가 소홀히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강연이나 세미나에서, “세 이론이 따로 놀지 말고, 십자가 복음이라는 큰 집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독려합니다.
특히 목회 교육 현장에서, 신학생들과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는 “도덕감화설이 단지 인간의 감정만을 자극하는 피상적 감동 설교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시킵니다. 만약 그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반드시 “십자가의 공의적 측면,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는 형벌대속론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또한 교인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붙들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설교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이 세 메시지를 잘 조합하여, 성도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십자가 구속’을 깊이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의 기본적인 목회 철학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올 때, 그들은 대개 절망과 죄책, 상처, 혹은 영적인 억압감에 시달리곤 합니다. 어떤 이는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라는 형벌대속론적 질문을 품고 오고, 또 어떤 이는 “이렇게까지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니 믿기지 않는다”라는 도덕감화설적 감동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의 악과 질병, 죽음을 왜 허락하시는가? 내가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 속에서 ‘승리자 그리스도’ 관점의 담대함을 갈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다양한 영적, 정서적, 지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십자가 구속의 모든 측면을 두루 조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뿐 아니라 다양한 저술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균형 잡힌 구속 신학을 소개해 왔습니다. 교회 내 소그룹 모임이나 제자훈련 과정에서도,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았다”는 확실한 교리 교육과 함께,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랑에 감동되어 회개했는가?”라는 점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지금 사단과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승리자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가?”라는 질문도 던집니다. 그러한 질문들은 결국, 성도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을 누리도록 돕는 장치가 됩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상처를 나누고,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십자가가 실제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체험하게 됩니다. 형벌대속론적으로 보면 “더 이상 정죄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자유와 해방감을 주고, 도덕감화설적 측면에서는 “나 같은 죄인도 끌어안아 주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며 눈물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또 삶의 구체적 문제, 예컨대 가정의 파탄이나 중독, 우울증, 영적 억압 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이미 사단의 세력을 이기셨다”는 승리자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실제적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종합적으로 작용할 때, 성도는 점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3장 25절에 담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선언은 단순히 한 문장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 모두에게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유발하는 근본적 진리입니다. 그 안에 ‘승리자 그리스도’의 해방, ‘형벌대속론’의 법정적 선언, 그리고 ‘도덕감화설’의 내면적 변혁이 자리해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목회자들은 이 세 차원을 골고루 설교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선명히 드러내고, 또 한편으로는 죄인까지 포용하시는 크신 사랑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쁨으로 선포합니다.
오늘날에도 “왜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 주시지 않고, 굳이 십자가 희생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나, “어떻게 2000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나에게 구원의 효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의문은 계속해서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오래된 신학적 논의와 교리뿐 아니라, 살아 있는 공동체의 체험과 간증을 통해 답해 주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그동안 강조해 온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리를 이해하고 암기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사랑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체험’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로마서 3장 25절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화목’이 교인 각자의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적대와 진노의 장벽을 허무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소식이 “복음”이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뜻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우리가 죄인이었던 시절에도 이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자랑이나 업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Sola Gratia), 그리스도의 희생을 붙드는 자에게는 의롭다 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죄로 가득했던 생애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도덕감화설이 설명하는 내면의 변화이며, 동시에 형벌대속론이 제공하는 안전한 법정적 지위, 또 승리자 그리스도가 허락하시는 해방의 기쁨입니다.
결국 교회는 이 아름다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이는 단지 지적인 토론이나 신학 강의로 그칠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실제로 “내가 죄에서 자유롭다”, “난 더 이상 정죄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 마음이 녹아내린다”, “사단의 음모와 세상의 유혹에도 난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처럼, 목회 현장에서 복음을 살아 움직이는 실제적 메시지로 전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늘 요구됩니다. 구속의 신비는 교회 역사상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 전파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로마서 3장 25절에서 선포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다시 붙들 때, 교회는 생명력 넘치는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능력이 세계 곳곳에 전해질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의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세 가지 이론을 아우르는 구속 신학은, 단지 하나의 관념이나 의견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은 바로 그 본질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화목으로 바뀌었다는 이 선포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하며, 승리자 그리스도이자 우리를 대신한 형벌의 대속자이며 내면을 감화시키시는 사랑의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는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