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라 – 장재형목사

1.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과 죄의 본질 장재형목사가 강의한 에베소서 4장에서 그의 초점은 바로 사도 바울이 권면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이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전의 옛 삶, 곧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 4:22), 이제 새로워진 심령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받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권면은 신약성경곳곳에 두루 등장하며,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컨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거듭난 사람의 변화를 강조한다. 바로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중생(born again)이며,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존과 윤리적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변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죄의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8절에서,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요한복음 16장 9절에서는“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시며, 죄를 한 줄로 요약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것이야말로 죄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고별설교에서 짧지만 본질적인 정의를 내리셨다면, 사도바울은 여러 서신을 통해 죄의 구체적인 면모와 인간의 타락성을 보다 세부적으로 다룬다. 로마서 1장 29-31절이나고린도전서 6장 9-10절,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골로새서 3장 8-9절, 디모데전서 1장 9-10절 등에 죄의 다양한 양상과목록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얼마나 깊이 죄에 물들어 있는지를 폭넓게 보여준다. 인간은 죄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인간의 어두운 실존은 창세기부터 분명히 드러나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그 악함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고,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복음 전파 사역 중 “죄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은혜가 얼마나 큰지 결코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전해왔다. 죄의 심각성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이 왜필요한지 절감하게 되고, 그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논지다. 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의 인격과 윤리, 행동 전반에 대한 전환을 요구한다. 많은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롬 10:9-10)하여 구원에 이르지만, 실제 삶이 변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이것은 죄의 뿌리가 깊고, 또 인간적 욕심과 옛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은 ‘옛 사람을 버리고새 사람을 입는다’는 추상적 구호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 변화를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으로 풀어낸다.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이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엡 4:25). 둘째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고(엡 4:26), 이어 ‘도적질하지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라’ 등등의 권면이 이어진다(엡 4:28-32).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은 죄가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에서 드러나는 악한행동, 말을 통한 파괴, 정욕과 욕심, 폭력과 위선 등 전인적인 타락으로 확대된다는 점을 경고한다. 동시에 우리는 새 사람이되었으므로, 이러한 죄의 열매들을 버리고, 진실과 사랑, 인자와 용서, 거룩과 경건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당부받는다. “새 사람”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거듭남’을 강조하신 말씀(요 3:3-5)과 맞닿아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는 육체적 재탄생이 아니라 영적 재탄생, 곧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을 뜻한다. 따라서 이 거듭남(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이루어지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를 “너희가 그 은혜를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생 이후에도 죄의 잔재가 우리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옛 사람을 계속해서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선언하는데, 이 말씀 또한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실제 신앙인의 삶 속에서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옛 습관과 죄성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새 사람’의 삶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직선한 말로 덕을 세우라”(엡 4:29),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엡 4:28)고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본받아, 이제는 빛의 자녀로서(엡 5:8) 세상을 살아가라는 구체적 요청이다. 부정적인 것을제거하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하나님의 선으로 채워야 한다는 메시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게 된 자라면 거짓을 버려야 한다’는 논리다(엡 4:25). 크고 작은 거짓으로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죄의 대표적 특징이다. 십계명의 제9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인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오늘날 미디어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거짓과 과장, 허위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자주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것을 말하고 옳은 것에만 굳게 서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진리 위에 견고히 서 있지 않으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크기 때문이다. 결국 “새 사람을 입으라”는 에베소서의 명령은 우리의 본질적 죄성을 해결하는 복음의 능력을 붙들고, 거기에서 출발해 삶전체를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죄는 단순히 믿지 않는 상태나 몇 가지 잘못된 행위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전 인격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그리고 영적 삶 전반에 파급력을 갖는다. 따라서 복음을 통해 얻은 구원은 그 죄의 뿌리를 뽑아내고, 동시에 성령의도우심으로 의와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한 뒤, 그에 걸맞은생활 윤리를 가르치는데,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로 요약되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죄를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레 19:2, 벧전 1:16).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분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하며, 이것이 신구약의 공통된 선언이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너희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고, 범죄한이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산다면, 당연히 거짓과 악을 버리고진리와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일서 1장 5절 이하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고선언하며,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함을 촉구한다. 이 빛과 어둠의 대조가 죄와 의, 거짓과 진실, 사망과 생명, 마귀와 하나님이라는 두 왕국 간의 대립을 상징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빛의 세계로 옮겨진 자다(골 1:13). 따라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정체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옛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새 사람인 체하는 위선에 빠지기 쉽다. 바울이 수시로 교회 안의 문제를 지적한 것도, 그 안에 여전히 거짓과 분열, 도적질과 음란 등 옛 삶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라면, 그 옛 습관과 죄악을 ‘아예 벗어버리고’(엡 4:22) 오직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은새로운 인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설교와 책을 통해 “거룩”과 “성결”이 단지 외적인 행동 수칙을 지키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인간 마음 깊숙이자리 잡은 불신과 죄성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람들은의지력이 강하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죄를 완전히 끊어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어야, 비로소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한편으로는 죄를 철저히 버리라는 경고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주시는 능력 안에서 이제 우리가 거룩과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며, 동시에 구원받은 공동체가 세상에서 마땅히 드러내야 할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의 구체적 권면 가운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바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라”(엡 4:26)라는 구절이다. 본래 산상수훈에서는 “분을 내지 말라”는 식의 강력한 가르침이 있지만, 여기서 바울은 인간이살아가면서 분을 내야 하는 정당한 상황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분노 자체가 죄가 아니라, 분을 잘못 다룰 때 죄로이어지고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분노에는 때때로 의로운 분노(義憤)가 있다.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내쫓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이 짓밟히는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셨다(마 21:12-13, 요 2:15-16 참조). 이것은 죄나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며, 우리가 세상의악이나 불의함을 보고도 아무런 통증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적 무감각 상태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정당’하거나 ‘의로운’ 이유로 시작된 분노라도, 자칫 통제되지 않으면 곧 죄의 문을 열어줄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분노를 잘못 처리하여 패망에 이른 여러 인물을 통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가인이다(창 4:1-16).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데 대해 가인은 심한 분노를 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가인에게 “네가 분을 내는 것이 옳으냐? 죄가 네 문 밖에 엎드려 있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창 4:6-7 참조). 가인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는 참혹한 범죄로 이어진다. 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되었고, 가인은 지독한 저주와 방황의 길에 들어섰다. 즉,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단적으로보여주는 예다. 또 다른 예로 구약의 선지자 요나를 들 수 있다. 요나서 4장에 따르면,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자, 요나는오히려 몹시 화가 나서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 4:9)라고 말한다. 그의 분노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까닭없는 분노였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에서 구원받았으면 선지자로서는 기뻐해야 마땅한데, 그는 그들의 멸망을 더바라며 화를 낸 것이다. 하나님은 벌레를 사용해 박 넝쿨을 마르게 하심으로 요나를 책망하셨고, “네가 이 박 넝쿨도 아끼거든, 니느웨 백성들은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라고 하셨다. 이는 분노가 합당한가를 헤아려보지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이유로만 화를 내는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대 사회에서도 ‘분노 조절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을 비롯한 다양한 연령층이 일상에서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극단적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여러 교육프로그램이나 설교에서, 인간 내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극단적 분노나 절망에 휩쓸릴 수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런 분노는 자기 파괴와 대인관계 파괴는 물론, 신앙의 길 전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에베소서 4장 26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일상의 매우 실제적인가르침이 된다. 분노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인간적 감정이다. 그러나 그냥 “화내지 말라”는 도덕적 훈계만으로는충분치 않다. 바울은 바로 뒤에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말하는데, 이는 분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쉽게원망, 증오, 폭력, 음모, 거짓 등으로 치닫고, 그 결과 사단이 활개칠 여지를 준다는 뜻이다. 분노가 죄로 이어지는 주요 경로 중 하나가 “혀”다. 에베소서 4장 29절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명령한다. 야고보서 3장 역시 혀를 “불의의세계”라 칭하며(약 3:6), 작은 불꽃이 큰 숲을 태우듯,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지니는지 경고한다(약 3:1-12). 혀로 뱉는말이 상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변함없는 진리다. 문제는 분노가 극심해지면 가장 먼저실수하는 영역이 말이라는 점이다. 격분 상태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이후 돌이킬 수 없는갈등으로 번진 사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베소서 4장 26-29절의 교훈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첫째, 분노를 느끼더라도 죄로 치닫지 않도록주의하라. 둘째, 해가 지기 전까지 그 분을 풀라. 셋째, 말로 상대를 해치지 말고, 오히려 은혜를 끼치는 방식으로 대화를전환하라. 이것이 신자들이 삶에서 분노를 다루는 올바른 원리라 할 수 있다. 분노가 쌓이기 시작할 때, 그 싹을 초기에 자르는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증오가 점차 깊어져서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된다. 틈을 준다는 말은, 마귀가 마음을파고들어 분노를 더 키우고, 온갖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는 것을 뜻한다. 이쯤 되면 심지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고, 더 나아가영적 영역에까지 치명적 손상을 일으킨다. 분노를 다스리는 구체적 방법론으로, 히브리서 12장 2절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앉으셨느니라.”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극도의 고통과 수치를 참아내셨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고통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사랑과 순종을 선택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앉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 우리가 이 예수를 바라볼 때, 분노 대신 오히려 참음과 사랑, 용서와 인내의 길이 열리게 된다. 구약의 모세 또한 분노로 인한 실패를 경험한 대표적 인물이다. 애굽 궁중에서 자란 모세는 애굽인의 부당한 폭력을 보고의분을 느꼈지만,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애굽인을 죽이고 말았다(출 2:11-15). 이는 모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과로이어졌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로 피신하여 오랜 기간 양을 치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40년간의 훈련끝에 모세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애굽 궁에서 배운폭력과 힘이 아니라, 온유로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수 있게 된 것은, 모세가 그 온유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을 종합해볼 때, 분노는 그 자체로 완전히 없앨 수 없는 인간의 정서이지만, 적절한 통제와 해소를 하지 않으면 쉽게죄가 되고, 스스로와 타인을 파괴한다. 장재형목사는 “분노를 비롯한 감정들을 묻어두기보다는 복음 앞에 솔직하게 꺼내 놓고,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성찰할 때 비로소 치료와 회복이 시작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제 상황을 회피하거나 ‘무조건참으라’는 식의 권위적 강요가 아니라, 말씀으로 내면을 조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분노의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는메시지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1절에서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결론적으로 선언한다. 이 악독(malice)은 뱀의 독처럼 은밀하고 집요하게 영혼을蝕(식)해 들어가는 증오심이기도 하다. 떠든다는 것은 소란과 다툼을 의미하고, 훼방은 비방과 모함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은 결국 전부 다 분노와 미움에서 비롯되는행동들이다. 따라서 “의분이니 괜찮다”며 방치하기엔 인간의 분노가 너무나 위험한 감정임을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혹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든 갈등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에베소서 4장의 가르침을 늘 기억해야한다.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화해를 이루거나 마음의 앙금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위해서는 용서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용서의 근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서로 용서하라”(엡 4:32)라는 복음의 원리다.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입었다면, 나도 마땅히 다른 사람을용서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결국 분노의 문제, 혀의 문제에서도 명확히 적용된다. 바울은 분노를 싹 제거하라는 소극적 명령에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한 말을 함으로써 서로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한다(엡 4:29). 우리가 분노와 불평, 비방의 말을내려놓고, 진리와 사랑, 격려와 칭찬의 말을 선택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며,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난다. 분노는 자연스럽지만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더욱이 죄로 발전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바울의 권면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영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다. 결국,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더 큰 사랑 안에 거해야 가능해진다.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인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분노 대신에 극률과 용서, 사랑과 화해를 선택할힘을 얻는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요, 새 사람의 특징이다. 예수를 깊이 묵상하지 않는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가죄가 되는 것을 매번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분노가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을바로 닫고 오히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실천이 곧 “새 사람”의 실천이다. 에베소서 4장의 말미(엡 4:28-32)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신자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윤리를 구체적으로열거한다. 그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고 권면하면서, 그 목적을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즉,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이기적 삶이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제’라는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죄의 본질이 ‘빼앗고 착취하는 것’에있다면, 새 사람의 삶은 ‘베풀고 구제하는 것’으로 반대되는 원리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함을 뜻한다. 십계명에서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는 제8계명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는 제10계명을 동시에확장해볼 수 있다. 물질만을 훔치는 행위 뿐만 아니라,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나 기회를 빼앗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도적질이다. 교회 안팎에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 혹은 합법적이지만 윤리적으로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방식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도적질로 간주될 수 있다. 새 사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도적질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소득을 공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이사도행전 20장에서 고별설교할 때, 스스로 자기 손으로 일하여 궁핍한 자들을 도왔다는 자전적 고백을 한 것은(행 20:33-35), 그가 직접 이 원리를 몸소 실천한 예다. 이어지는 권면에서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며,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고 한다. 새 사람의 특징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듯이, 혀는너무나 작은 지체이지만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큰 키와 같고, 작은 불씨로 큰 산불을 일으키는 무서운 잠재력을 지닌다(약3:1-6). 따라서 이 혀를 통해 “은혜를 끼치는 말”을 전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윤리적 의무이자 특권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거하신다면, 우리의 말투와 언어 습관에도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권고한다.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며,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악을행할 때 근심하신다. 이미 우리 안에서 인치심을 통해 구원의 확증을 주신 분께 우리가 거슬러 행동한다면, 성령이 근심하시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내 삶을 조정하는과정이다. 우리가 악한 욕망이나 분노, 거짓, 더러운 말 등에 사로잡히면, 바로 그 성령의 민감한 음성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영적 성장이 막히거나 후퇴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 31-32절에서 바울은 총체적으로 한 번 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대비시킨다. 버려야 할것들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의”다(엡 4:31).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는말씀이다. 이 구절은 새 사람의 윤리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가 기준이되므로, 이것은 엄청나게 높은 표준임을 알 수 있다. 왜 바울은 서로 용서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할까?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분열과 다툼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덕목이용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마 6:12)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에게 죄를 범한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진정성을담을 수 없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도동료의 적은 빚을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지적하시며, 용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셨다(마 18:21-35). 장재형목사는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 또는 교회의 분쟁 해결을 다룰 때, 에베소서 4장 32절을 자주 인용하면서 “용서란 나의힘이나 도덕적 선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적인 관점에 머무르면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지? 저 사람이 잘못했는데?”라는 마음이 생기지만, 복음의 빛 아래에서는“나도 용서받은 죄인이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의식이 앞서기에, 용서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바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삶이다. 바울은 단지 “용서가 좋으니 해라”라는 당위만 설파하지 않는다. 그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기독교 윤리의 특징은 인간적 선행을 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와 속성을 본받는 데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가 우리의 표준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때문이고(요일 4:19),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신자의 삶의 근거이자 동력이다. … Read more

十字架の贖いの神秘 – 張ダビデ牧師

1. ローマ書3章25節の意味と贖いの神秘 ローマ書3章25節は「このキリストを神は、その血によって信仰により和解のいけにえとして立てられました。それは、神が長く忍耐してこられた中で、以前に犯された罪を見過ごしてこられたことによって、ご自身の義を示されるためです」という内容を語っています。この短い一節の中には、キリスト教神学が長い年月をかけて議論し、熟考してきた贖い(贖罪)の核心的教理が凝縮されています。使徒パウロは、イエス・キリストの死と流された血によって、人間が罪と死の支配から自由にされると宣言します。しかし、「二千年前のある日、カルバリの丘で流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血が、なぜ今日の私の罪を清め、赦す力となり得るのか?」という問いは、信者にとってさえ時に受け入れ難い神秘でもあります。ましてや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ない人々にとっては、その疑問はいっそう大きいに違いありません。人間の理性によって正確に測り知ることが難しい「贖いの神秘」がまさにここにあ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の問いに対し、キリスト教の贖罪教理は、人間のあらゆる罪を一瞬にして洗い清める超越的かつ永遠的な力に関係しているのだと強調してきました。キリストが十字架で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人間が犯したすべての罪、そしてこれから犯す罪さえも覆われたという教えは、表面的にはやや非合理的に感じ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福音は「神の恵みによる救い」を語っており、その恵みこそが人間の知性や感情を超えて歴史すると聖書が証言しています。パウロの教えもまた、「律法の行い」ではなく「キリストの犠牲とその血」による信仰を通じて義とされる、という点に焦点を当てています。 実際、「神が長く忍耐してこられる中で以前の罪を見過ごしてこられた」という言葉は、一見すると神の裁きと義が保留されたかのように見えますが、究極的にはキリストの死において神の義(義)と愛が同時に現れたことを意味します。ここで重要なのは、神の「忍耐」と「怒り」が矛盾するという意味ではなく、罪に対する正しい裁きが必ず行われねばならない一方で、その裁きの刑罰を罪人ではなくイエスご自身が受けられたという点です。これはまさに「刑罰代償論(Penal Substitution Theory)」の基礎となり、同時に神の愛の大きさを示す出来事でもあります。 しかし、人々はこの愛を単純に頭で理解するというよりも、心で受け止める体験の中で真の変化を経験するものです。その意味で、「イエス・キリストの自己犠牲的な愛の物語が私たちを深く感動させ、変化させる」と主張する「道徳感化説(Moral Influence Theory)」も、信仰の実際の体験を説明する上で意義があります。同時に、キリスト教史上最も古い形態の贖罪論といわれる「勝利者キリスト(Christus Victor)」、すなわち「古典的贖罪論(Classical Theory of Atonement)」は、サタンと罪の権勢を打ち破って人類を解放したキリストの勝利を強調し、贖罪の出来事が宇宙的な規模で起こった霊的戦いの勝利であることを宣言します。 このように、贖罪教理に関するさまざまな視点は、それぞれに異なる焦点を合わせつつも、すべてイエス・キリストの死と復活を通して人間が救われるという福音の本質を志向しています。張ダビデ牧師もまた、福音の真髄を語る際に、神の無条件の愛を説きながらも、罪を滅ぼし私たちを自由に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キリストの血潮の力を豊かに教えます。そしてその際、「神の怒り」と呼ばれる側面を否定するのではなく、聖書がはっきりと怒りや裁きを言及していることを直視しつつ、その裁きを超える恵みがどのように作用するかを説教します。 パウロが「神の怒り」について語るローマ書5章9節と10節では、「それで今や、私たちは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すから、いっそう彼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ことになります。…私たちが神の敵であった時、その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られたのなら…」と述べられています。これは、罪人である私たちが事実上、神の敵対者の状態にあったことを示唆しています。「敵」とは決して和合できないような敵対関係を意味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神が怒りだけを注がれていたなら、私たちに望みはありませんでした。けれどもローマ書3章25節と5章9-10節に表される福音の核心は、この敵対関係を回復し、「和解の関係」へと変える主の犠牲、すなわちその血を流されることによる和解なのです。まさにこの点において、「キリストの贖いの御業」は、神の怒りさえもキリストのうちで愛へと転換させる劇的な出来事とな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の説教では、この「神の怒りからの救い」という主題がしばしば取り上げられます。彼は、神の愛を強調するあまり「怒りは必要ない」と言う極端にも、逆に人間の罪を指摘して「神の怒りしか存在しない」と言う極端にも、共に警戒すべきだと力説します。福音はすでに「キリストの血潮」によって罪と死の権威が屈服したと語りつつも、キリストの犠牲が私たちの心を変化させる(道徳感化説)と同時に、罪に対する刑罰が実際に代償された(刑罰代償論)という事実を共に見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そしてそれを通して、罪の鎖が断ち切られた(勝利者キリスト)ことが明確に表されるべきだと説きます。 一方、福音書を見ると、イエスが地上で活動された際、すでに罪の赦しを宣言しておられた場面が頻繁に登場します。マルコの福音書2章では、屋根を破って下ろされてきた中風の人にイエスが「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おっしゃったくだりが代表的です。この出来事は当時の宗教指導者たちに大きな衝撃を与えましたが、彼らは「神だけが罪を赦すことができる」という点を強調し、イエスが神を冒瀆していると非難しました。しかしイエスは実際に彼を癒し、罪を赦す権威を示されたことで、ご自分が何者であるかを明らかにされました。この罪の赦しの権威は、究極的には十字架の出来事で完成します。十字架上での死は、イエスの公生涯で繰り返し示されていた罪の赦しの決定的な頂点となり、またその後の復活によって罪と死の権威が無力化されたことが宣言されたのです。 パウロが強調する「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という表現は、罪が決して軽い問題ではないことを教えます。罪は神の聖なるご性質に逆らうものであり、最終的には怒りの対象となるのです。しかし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私たちが義とされたとき、その怒りはもはや私たちに向けられない、これこそ福音の喜ばしい知らせです。これが贖いの本質であり、人間の功績や努力では得られない「全的な恵み」でもあります。だからこそ張ダビデ牧師は、この点を強調する度に「神は怒られるが、同時にその怒りをご自身で担われる。だからこそ私たちは限りなく感謝すべきである」と説教します。 このように見ると、ローマ書3章25節はパウロ神学の精髄が凝縮された節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の死とその血潮の効力が私たちに及ぶ過程は、理性で完全に把握しがたい部分がありますが、パウロは私たちが信仰によってこの事実を受け入れるとき、義とされるのだとはっきり宣言しています。そして聖書全体がこの宣言を支えています。旧約の祭司制度もまた「血を流すことなしには罪の赦しはない」(ヘブライ9:22)という原理に基づいており、イエス・キリストが真のいけにえとしてご自分をささげられることによって、すべての儀式的犠牲が最終的に完成した、というのがキリスト教の伝統的教えです。 結局、「二千年前の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が、なぜ私の過去・現在・未来の罪までも清めるのか?」という問いに対する答えは、人間的な時間ではなく、「神の永遠のうちでの出来事」という視点の中に見いだせます。張ダビデ牧師もこれを説教するとき、私たちは歴史の瞬間の中で時間の制約を受けますが、神は昨日も今日も永遠に変わることなく働かれ(ヘブライ13:8)、キリストの犠牲はすべての時代、すべての人々に同じように効力をもたらすのだと強調します。そしてこれが「信仰によって起こる」出来事であるため、すべての人間はただ恵み(Sola Gratia)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られるのだと繰り返し語ります。 2. 三つの主要な贖い(贖罪)論とその神学的含意 キリスト教の歴史において、「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が、私たちの救いをどのようにもたらすのか?」という点については、さまざまな理論が提示されてきました。最も一般的な分類としては、第一に「勝利者キリスト(Christus Victor)」、第二に「刑罰代償論(Penal Substitution Theory)」、第三に「道徳感化説(Moral Influence Theory)」という三つの類型が代表的です。これら三つの理論はいずれもキリスト教の贖罪教理を説明しようとする試みであり、それぞれが異なる観点を強調するものの、どれか一つがすべてを代替したり、他を完全に排除したりす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多くの神学者や牧師たちは、「この三つが調和を成すとき、十字架の贖いがさらに立体的で豊かに理解される」としばしば語ります。張ダビデ牧師もこのような統合的視点を取り、教会がこれら三つの側面をバランスよく宣教する必要があると強調しています。 まず、勝利者キリスト(Christus Victor)は最も古典的な贖罪論として「贖いの代価論(Ransom Theory)」、あるいは「劇的贖罪論(Dramatic Theory of Atonement)」とも呼ばれます。初代教会の時代からこの理論はキリスト教信仰告白の基盤にあり、それゆえ「古典的贖罪論(Classical Theory)」という名称が付されています。その核心は、人間が罪の権威、サタンの支配下に隷属していたが、キリストがご自分のいのちを代価(ransom)として支払い、人間を解放されたという概念です。すなわち「人の子が来たのは、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であり、多くの人の代わりに自分のいのちを『身代金』としてささげるためである」(マルコ10:45)というイエスの言葉を根拠に、キリストがサタンとの霊的戦いで勝利することによって、人間を奴隷状態から救い出したという解釈です。 この視点は、宇宙的規模で起こった巨大な「霊的ドラマ」を想定します。神に背き、罪に陥った人類がサタンの捕虜となり、サタンは人類を人質にとって神に要求を突きつける悪しき存在として描かれます。しかしキリストが十字架で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人間を「代価を払って買い戻された」構図の中で、サタンは決定的に敗北し、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罪と死の権威が永遠に打ち破られた、というのが「勝利者キリスト」論の要旨です。張ダビデ牧師はこの観点を説明するとき、「イエスの死は受動的な出来事ではなく、イエスが自ら進んで私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差し出し、サタンの手から私たちを救出する能動的な解放の働きだった」と力説します。そしてこの解放の働きこそが「私たちの罪の鎖を断ち切り、死と絶望の谷からいのちと希望へ移される恵みの出来事」であると強調しています。 第二の理論は、宗教改革者たちや正統主義神学で最も広く受け入れられた「刑罰代償論(Penal Substitution Theory)」です。これは「イエス・キリストが罪人に代わって刑罰を受けられた」という点に主眼を置き、他の呼び方では「刑罰代償説」あるいは「満足説」とも言われます。罪に対する神の公正な裁きは必ず実行されねばなりませんが、私たちがそれを受ければ死ぬしかありません。ところがイエスが私たちの身代わり(Substitute)となって十字架で刑罰を負われ、そのことによって神の御前で私たちは満足(satisfaction)を得るに至った、というのが刑罰代償論の核心です。この理論は神の公義と愛を同時に保持する試みとも理解できます。すなわち、罪を見過ごせない神の公義がある一方で、その刑罰を罪人ではなく罪なきイエスが担われたゆえ、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救いにあず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の刑罰代償論が「キリスト教の救いの深遠な神秘を客観的かつ法廷的イメージで説明するのに優れている」と評価しています。イエスが十字架の上で「すべては完了した」(ヨハネ19:30)と語られたとき、それは人間が負っていた刑罰と責任を完全に終わらせたという宣言とも捉えられます。すなわち律法が要求する代価、すなわち罪の対価をイエスの犠牲によってすべて支払われた、という意味です。パウロがローマ書で「その血によって義とされた」と強調するのも、まさにこの「刑罰代償」を通して罪人が罪の報いを免除され、義人として宣言されるという真理を語るものです。こうした理由から、教会史の中でもこの理論は非常に強い支持を得てきました。そして実際、多くの教会の説教や礼拝の中で「イエスの十字架が私たちの罪の代価を支払われた」というメッセージが繰り返し宣言されてきました。 第三の理論である「道徳感化説(Moral Influence Theory)」は、12世紀にピーター・アベラール(Peter Abelard)によって体系的に提示された後、近代から現代にかけてさまざまな形で発展してきました。この理論は、十字架の出来事が人間の心に大きな感化をもたらすと主張します。イエス・キリストが罪人のために自らへりくだり、十字架につけられて死なれた極限の愛の物語は、それを聞く者の心を溶かし、深い悔い改めと変化を起こし、その結果として罪から離れた聖なる生き方へ導くというのです。刑罰代償論が比較的「客観的」かつ「法廷的」なニュアンスを伴うのに対し、道徳感化説は救いの「主観的体験」や「内的変化」により焦点を置きます。 道徳感化説に対する批判も存在します。代表的なものは「神の怒りをどのように説明するのか?」という点です。また「十字架の客観的贖罪の働きがなければ、単なる感動だけで人が新生できるのか?」という疑問も提起されます。それに対して道徳感化説を支持する人々は、「罪人たちが神に立ち帰るのは、ただ法廷的宣言だけによるのではなく、神の愛を徹底的に体感するときに初めて可能となる」と答えます。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の犠牲がもたらす深い感動こそが、人間の魂の回復へとつながる」というのです。 張ダビデ牧師は、これら三つの理論のうちどれか一つだけが正しいと主張することはせず、「それぞれが特別な役割を果たし、相互補完的に十字架の豊かな意味を示す」と教えて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の死は、サタンとの戦いにおける勝利を示す宇宙的事件(Christus Victor)であると同時に、罪に対する刑罰を完全に支払われた代償的犠牲(Penal Substitution)であり、さらに人間の心を捕らえる愛の極致(Moral Influence)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実際、多くの教会の伝統において、イエスの十字架の贖いを黙想するときに、これら三つの次元をそれぞれ味わうことで、その出来事をより立体的かつ深く捉えられるという証言が少なくありません。 また教会史を振り返ってみても、ある時代は刑罰代償論を中心に十字架の意味を浮き彫りにしてきましたし、初代教会時代にはむしろ勝利者キリストの概念のほうが一般的に受容されていました。近代以降は個人主義や心理学的アプローチが発達したこともあり、道徳感化説が優勢になる傾向を示してきました。こうした歴史を顧みると、教会が決してある一つの理論に固執することなく、福音の核心を守りつつ、状況や時代が抱える問いに応えるために多様な表現を試みてきたことが分かります。 張ダビデ牧師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救われた」という告白は、一面ではサタンの権威からの解放であり、別の面では罪に対する刑罰が代償されたという安心感であり、さらにまた「これほどまでに私を愛してくださるのか!」という悟りの中で変えられる感動的体験を意味すると説教します。これはすなわち、三つの理論が相補的に働くという証言です。礼拝の場で賛美と御言葉に触れながら、悔い改めや決断を繰り返し経験するというのは、ある意味道徳感化説がいう「私たちの内面で起こる変革」に近いかもしれません。同時にキリストの血潮によって「刑罰は終わった」という教理的理解が私たちに平安を与えます。そして宣べ伝えられる福音は「イエス・キリストがすでに勝利された」という宇宙的な希望を同時に示してくれます。 結局、ローマ書3章25節という一つの短い節の中にも、これほど豊かな贖罪の意味が含まれている事実にクリスチャンたちは大きな気づきを得るのです。パウロが「その血によって信仰により和解のいけにえ」と表現するとき、実のところキリストにおいて成し遂げられた贖罪の業は、一言で簡潔に定義しきれないほど多面的であることを直感させます。キリストの勝ち取られた勝利、私たちが代償を受け取った刑罰、そしてその愛が私たちの内側に生み出す聖なる感動は、結局は同じ一点で交わります。それこそ「神の愛が十字架によって完全に示され、その愛が信じる者を永遠に自由にす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3. … Read more

Le mystère de la rédemption de la Croix – Pasteur David Jang

1. Le sens de Romains 3:25 et le mystère de la rédemption Romains 3:25 déclare : « C’est lui que Dieu a destiné, par son sang, à être pour ceux qui croiraient victime de propitiation, afin de montrer sa justice, parce qu’il avait laissé impunis les péchés commis auparavant, au temps de sa patience ». Dans ce … Read more

El misterio de la redención de la Cruz – Pastor David Jang

1. El significado de Romanos 3:25 y el misterio de la redención Romanos 3:25 dice: “A quien Dios puso como propiciación por medio de la fe en su sangre, para manifestar su justicia, a causa de haber pasado por alto, en su paciencia, los pecados pasados.” En este breve versículo encontramos el núcleo central de … Read more

The Cross’s Redemption – Pastor David Jang

1. The Meaning of Romans 3:25 and the Mystery of Redemption Romans 3:25 says, “God presented Chris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the shedding of his blood—to be received by faith.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righteousness,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This short verse contains … Read more

십자가 구속의 신비 – 장재형목사

로마서 3장 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는 기독교 신학이 오랜 세월 동안 논쟁하고 숙고해 온 구속(속죄)의 핵심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흘림을 통해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 Read more

十字架救赎的奥秘 – 张大卫牧师

1. 罗马书 3章25节的意义与救赎的奥秘 罗马书 3章25节写道:“神设立耶稣作挽回祭,是凭着耶稣的血,借着人的信,要显明神的义;因为他用忍耐的心,宽容人先时所犯的罪。”在这简短的一节经文中,蕴含了基督教神学长期以来反复探讨与辩论的救赎(赎罪)核心教义。使徒保罗宣告:因着耶稣基督的死和流血,人类得以从罪与死亡的权势中得到自由。然而,对于信徒而言,有时甚至也会产生这样的疑问——“两千年前在各各他山上流的耶稣基督之血,究竟如何能赦免并洁净我今天的罪呢?”对不信者而言,这个疑问更是深刻。因为以人的理性去衡量,这“救赎的奥秘”常常很难被准确解释。 关于这一点,张大卫牧师多次强调,基督教的救赎教义关乎神那超越时空、永恒不变的能力,能够在一瞬间涤荡人的一切罪。基督在十字架上所流的宝血,遮盖了人类过去的罪,甚至未来将要犯的罪;表面上,这教导似乎略显不合乎理性。然而,福音所宣告的,正是“因着神的恩典而得的救恩”,而这恩典超越了人的理性与情感。《圣经》也多处证明,神的恩典在超越人的智慧之外真实地运行。保罗的教导亦聚焦于:不是靠“律法的行为”,而是通过“基督的牺牲和宝血”使我们因信称义。 事实上,“神用忍耐的心,宽容了人先时所犯的罪”,乍看之下,好像神暂时搁置了审判与公义,但最终却在基督的死之中同时彰显出神的义(Justice)与爱。在这里的重点并非“神的恒久忍耐”与“神的忿怒”彼此矛盾,而是:罪理应受到公义的审判,但那审判与刑罚并没有落在罪人身上,而是由耶稣基督自己承担了。这正是“刑罚代赎论”(Penal Substitution Theory)的基础,也同时昭示了神何等伟大的慈爱。 然而,人们常常不是仅仅通过理性来理解这份爱,而是在心灵的领受与体验中经历到真实的改变。在这一点上,“道德感化说”(Moral Influence Theory)所强调的“耶稣基督舍己的爱之故事,让我们在深深的感动中被改变”也不无道理,能相对准确地描述信仰的实际经历。与此同时,在基督教历史中被称为最古老的救赎理论——“得胜者基督论”(Christus Victor)或“古典救赎论”(Classical Theory of Atonement),则侧重于宣告基督粉碎了撒但和罪的权势,释放了整个人类,展现了宇宙层面的属灵争战之胜利。 如此看来,对于救赎教义的诸多视角,虽然侧重点各有不同,但都指向这样一个福音本质:人因耶稣基督的死与复活而得救恩。张大卫牧师在传讲福音真髓时,同样高举神那无条件的慈爱,也大力教导基督的宝血如何灭绝罪,并使我们得自由。同时他并不忽视《圣经》所清楚提及的“神的忿怒”与审判这一面,而是在宣告“超越审判的恩典如何生效”之时,亦正视神忿怒与审判的真实存在。 保罗在罗马书5章9-10节中提到“神的忿怒”:“现在我们既靠着他的血称义,就更要借着他免去神的忿怒……我们作仇敌的时候,且借着神儿子的死,得与神和好……”。这暗示了罪人事实上与神为敌的状态。“仇敌”意味着一种似乎绝无和解可能的敌对关系。如果神只是一味倾倒忿怒,我们便毫无盼望。但罗马书3章25节以及5章9-10节所启示的福音核心,在于基督牺牲、流血所带来的和好,化解了这原本无解的敌对。所以,“基督的救赎工作”在这里成为一幕戏剧性事件:竟然将神的忿怒也在基督里转化成了爱。 在张大卫牧师的讲道中,“从神的忿怒中得救”这个主题经常被谈及。他提醒我们,不可因为过分强调神的爱就走向“无需忿怒”的极端,也要避免只指出人的罪、宣称“神只有忿怒”这样的极端。福音已经宣告“因基督的宝血,罪与死的权势都已屈服”,同时也呼应着“基督的牺牲能改变人心”(道德感化说)和“罪的刑罚在实际上已被代赎”(刑罚代赎论)这两方面。当我们理解并宣告这些,便更清晰地显明了罪的锁链已经被斩断(得胜者基督),福音由此更为丰满。 在福音书中,耶稣在世上传道时,已多次宣告罪得赦免。马可福音第2章中记载了耶稣对被人从屋顶坠下、无法行动的瘫痪病人说:“你的罪赦了”。当时的宗教领袖深感震撼,他们强调“唯有神能赦罪”,并指控耶稣亵渎神。然而,耶稣不但治好了这病人,更显明自己拥有赦罪的权柄,也籍此启示了他是谁。最终,罪的赦免在十字架事件中达到巅峰。耶稣在十字架上牺牲,成就了他在传道中已不断展现的罪之赦免,并在他复活之后宣告:罪与死亡的权势已彻底被摧毁。 保罗所说的“我们要从神的忿怒中得救”,提醒人们罪的严重性:罪并非轻描淡写的小错,而是抵挡神的圣洁,理应成为忿怒的对象。然而,因着基督的血我们得以称义,就不再要面对这忿怒了——这便是福音的好消息。这正是救赎的本质,也是人绝无可能凭自己的功劳或努力获得的纯粹“恩典”。因此,每当张大卫牧师讲到此,便再三强调:“神会忿怒,却同时由自己承担那忿怒,好使我们心怀无限感恩。” 如此看来,罗马书3章25节可谓凝缩了保罗神学的精华。基督之死与流血对我们的功效,理性也许无法穷尽,但保罗却清晰地宣告:当我们借着信心领受这事实,就得以称义,而整本《圣经》都在见证这一宣告。旧约祭祀制度也基于“若不流血,罪就不得赦”(来9:22)的原则,而耶稣基督作为真祭物献上自己,彻底完成了一切祭祀礼仪,正是基督教传统所教导的真理所在。 归根结底,对于“耶稣基督在两千年前的十字架之死,如何能洁净我过去、现在、将来的罪”这一问题,答案可在“神永恒的视域”中找到。张大卫牧师在讲道时也常提及:我们活在时间的限制中,但神却超越时空,“昨日、今日、一直到永远,是不改变的”(来13:8)。因此,基督的牺牲对历世历代所有人都具有效力。而正因为这是“藉着信心”领受的救赎,每个人唯独凭恩典(Sola Gratia)才能得蒙赦罪,毫无可夸。 2. 三种主要的救赎(赎罪)理论及其神学含义 基督教历史中,对于“耶稣基督的十字架之死如何成就救恩”这一话题,神学家们提出了多种理论。最常见的分类方式,将其归纳为三大类型:第一,“得胜者基督论”(Christus Victor),第二,“刑罚代赎论”(Penal Substitution Theory),第三,“道德感化说”(Moral Influence Theory)。这三种理论都试图阐明基督教的救赎教义,彼此关注点不同,但并非互斥或能完全取代彼此。许多神学家和牧者都认为:“这三种理论若能彼此调和,将能更全面、更丰富地理解十字架的救赎。”张大卫牧师也是秉持这样的综合视角,并主张教会应平衡宣讲这三个面向。 首先,“得胜者基督论”(Christus Victor)是最古典的救赎理论,又称为“赎价理论”(Ransom Theory)或“戏剧性救赎论”(Dramatic Theory of Atonement)。自初代教会起,此理论即已成为基督信仰告白的核心,因此也被称作“古典救赎论”(Classical Theory)。其要点在于:人类在罪与撒但的权势之下作奴仆,而基督以自己的生命作为赎价(ransom)将人类救出。“因为人子来,并不是要受人的服事,乃是要服事人,并且要舍命作多人的赎价。”(可10:45)正是这一关键经文的依据。由此解释:基督借着自己的死与撒但展开属灵争战,最终得胜,释放了被掳的人类,借复活宣告罪与死的权势被永远摧毁。 这种观念把十字架事件视为发生在宇宙层面的“属灵大戏”。因着背离神而堕落犯罪的人类,被撒但掳为囚徒;撒但如同绑架人类要胁神的邪恶之徒。然而,基督在十字架上舍命,好比付出赎金,夺回了人类,撒但因此遭遇决定性的失败。张大卫牧师在讲解此观点时,往往会强调:“耶稣之死绝非被动事件,而是主耶稣甘愿为我们舍命,以此积极拯救我们脱离撒但之手的解放行动。”这正是“斩断罪的枷锁,使我们从死亡与绝望的幽谷转入生命与盼望”的恩典性事件。 第二,“刑罚代赎论”(Penal Substitution Theory)在宗教改革家及正统神学思想中最为普及。它强调“耶稣基督替罪人承担了刑罚”,又被称作“刑罚代偿说”或“赔偿满足说”。神的公义要求对罪的惩罚;若由我们自己承担,只能灭亡。于是,耶稣替我们承担了刑罚,使我们在神面前得到“满足”(satisfaction)并因此称义。这理论力图同时维护神的公义与神的慈爱:在神不能轻忽罪的公义要求下,罪的刑罚确实被实行,却不是落在罪人身上,而是落在那无罪的基督身上;结果,我们凭信心得救。 张大卫牧师评价说:“刑罚代赎论在阐明基督教救恩之深邃奥秘,且以客观且司法性的形象作出解释,颇有独到之处。”当耶稣在十字架上宣告“成了”(约19:30)时,也可被理解为:人类欠下的罪债已经彻底偿清,律法对罪的要求已由耶稣一次性地承担完毕。保罗在罗马书中强调“借他的血称义”,即指出:透过“刑罚代赎”,罪人罪债得以免除,被宣布为义。因而,在教会历史里,刑罚代赎论一直享有强大的支持。实际上,许多教会的讲道与敬拜也频繁宣讲“耶稣的十字架替我们付清了罪价”这一信息。 第三,“道德感化说”(Moral Influence Theory)则是12世纪时由彼得·阿伯拉尔(Peter Abelard)系统提出,并在近现代不断发展变化。它强调十字架事件在人的内心引发的强大感化。耶稣基督愿意为罪人卑微降世、并在十字架上牺牲的最高爱之故事,软化人的心,使人悔改更新,进而带出圣洁的生活。相较于“刑罚代赎论”的客观与司法性倾向,“道德感化说”更注重救恩的“主观经历”与“内心变革”。 对道德感化说也不乏质疑,例如,“如何处理神的忿怒?”、“若缺乏十字架客观的救赎功能,仅凭感动能否使人真正重生?”等等。感化说的支持者则回答:“罪人归向神,不仅是因为一纸司法声明,而更是当罪人切实经历神的爱时,才得以重新转向神。”换言之,“基督牺牲的爱所带来的强烈感动和震撼,会使人的灵魂得到医治与更新。” 张大卫牧师并不主张只拥护其中任何一个理论,而是指出:“三种理论各有其特殊作用,唯有彼此互补,才能更全面地彰显十字架的丰富意义。”也就是说,耶稣基督之死既是宇宙层面与撒但争战的胜利(Christus Victor),也是对罪的刑罚作完美代赎(Penal Substitution),并且是震撼人心的爱之极致(Moral Influence)。实际上,在众多教会传统中,信徒默想耶稣的十字架救赎时,若能同时体认到这三种层面,往往更能深切体会十字架事件的立体性与深度。 此外,教会历史上,不同时代往往有侧重点:有些时期更突出刑罚代赎论,早期教会对“得胜者基督论”更加熟悉,近现代则因个人主义与心理学的兴盛,更关注道德感化说。而回顾这段历史,可发现教会并不拘泥于某一理论,而是在坚守福音核心的前提下,因应不同时代与群体的需要,尝试多元表达。 张大卫牧师讲道时也常提到:“我们认信耶稣基督为救主时,一方面意味着从撒但权势下获得释放,一方面因罪的刑罚被代偿而心中踏实,另一方面则是当我体会到‘他竟然如此爱我!’时,内心被感动而更新。”换言之,这三种理论并非分割运作,而是互相补足,共同见证。当我们在礼拜中藉着诗歌和信息反复经历悔改与决志时,这很符合道德感化说所提的“内心被改变”。与此同时,通过对“基督宝血带来刑罚的结束”这一教理性理解,我们能得平安。而福音的宣告亦给予我们“基督已得胜”的宏大盼望。 … Read more

Orientations pour la sainteté et la pureté de l’Église moderne – Pasteur David Jang

La société contemporaine, en constante évolution sur les plans culturel, philosophique et moral, confronte l’Église et les croyants à une question fondamentale : comment maintenir leur identité et appliquer la vérité biblique dans leur vie quotidienne ? Face à des phénomènes tels que le matérialisme, le relativisme, la sécularisation, l’indifférence religieuse ou encore la confusion … Read more

当代教会迈向圣洁与纯洁的指引 —— 张大卫牧师

当今社会在急速变化的文化、哲学与道德环境之中,向教会和信徒提出了根本性的质问:他们如何在保持自我身份认同的同时,又能将圣经真理应用到现实生活中去?物质主义、相对主义、世俗化、对宗教的冷漠以及道德混乱等现象,不仅要求教会与信徒停留于传统规范的层面,更呼唤他们做出深层且切实的信仰回应。在这样的时代背景下,张大卫牧师专注于将圣经的深刻洞见与当代生活相结合,特别强调教会群体的纯洁性与信徒的圣洁生活。 张大卫牧师综合地诠释了保罗书信、约翰福音第15章、以弗所书、帖撒罗尼迦前书、加拉太书、罗马书等新约圣经的多处经文。他将教会视为与基督合而为一的属灵实体,并由此阐明教会必须建立成为圣洁且纯净的群体。这种呼召并非仅仅停留在外在的道德或伦理标准之上,而是要每位信徒都切实活在基督里,通过这样的实践使整个教会能在世上彰显神的荣耀,带着这样的异象继续前行。 尤其是针对哥林多前书5-7章中保罗所探讨的教会内部淫乱、道德混乱以及婚姻和独身等问题,张大卫牧师在当代语境下进行了重新诠释。他为今天的教会与信徒如何保持真正的圣洁与纯洁提供了实践性的指引,强调教会不可随波逐流,与世俗价值妥协或放任罪恶,而应通过与基督的属灵联合来恢复圣洁。 本篇文章将依据张大卫牧师的神学方向与牧会重点,从以下六个方面着手:第一,教会纯洁性建立所需的神学与圣经根基;第二,从末世论角度重新阐释婚姻与独身并应用于信仰与生活;第三,透过彼此担当重担、实践爱的群体奉献;第四,藉着约翰福音15章葡萄树与枝子的比喻,阐释信徒与基督的联合和结出果实的重要性;第五,将上述要点置于当代文化与哲学背景下所蕴含的意义;第六,在结论中结合这些内容,为教会与信徒今后的方向提出综合性建言。 一、教会的纯洁性 在张大卫牧师的核心讯息中,“教会的纯洁性”是重中之重。这种纯洁并不单指制度上的洁净或伦理规范的维护,而是指教会通过与基督深度属灵联合、逐渐预备自己成为圣洁新娘的进程。以弗所书第5章将教会比喻为基督的新娘,说明基督为教会舍己的目的正是为了“使教会成为圣洁、没有瑕疵”的群体。因此,张大卫牧师强调,现代教会必须不断地自省与悔改,抵挡世俗价值观和道德败坏的侵蚀,守住教会本质的身份。 在哥林多前书5-6章,保罗严厉斥责了教会内部蔓延的淫乱与道德败坏,呼吁信徒清除罪恶,维护整个群体的纯洁性。基于此经文,张大卫牧师指出,淫乱不仅是单纯的道德败坏,更是有损教会属灵本质的严重问题。若教会与基督合为一体,那么不道德的行为就宛如给教会的肢体留下溃烂的伤口。 帖撒罗尼迦前书第4章中,保罗宣告“神的旨意就是要你们成为圣洁”,张大卫牧师据此主张应将罪视为人与神关系的破裂,而不仅是对伦理标准的破坏。成圣不只是道德的改善,而是活在基督里,并通过圣灵的大能来更新内心。从而,信徒能够胜过淫乱、谎言、贪欲等世俗诱惑,教会也能在世人面前散发出圣洁的光辉。 参考哥林多前书第6章所提“你们的身体是圣灵的殿”这段教导,张大卫牧师也再次强调,个人的伦理状况必然与整个教会的属灵状态息息相关。当信徒将自身当作“活祭”(罗12:1)奉献给神,众多这样圣洁的生命就会汇聚成一个更加纯洁的整体,教会也因此能彰显神的荣耀并在世上作美好的见证。 二、婚姻与独身 哥林多前书第7章论及婚姻、独身和夫妻关系,既是对当时文化问题的回应,更蕴含了保罗在创世秩序与末世张力之中,对信徒生活的神学思考。张大卫牧师在当代语境下重释保罗的教导,强调婚姻和独身都能成为信徒奉献与成圣的多样途径。 婚姻并非只是社会契约或肉体结合,正如以弗所书第5章所示,它象征着基督与教会的合一,是一项神圣而崇高的制度。丈夫与妻子彼此委身、彼此尽责,藉此实践神在创造中的秩序,并在家庭这一小型群体中实现圣洁的体现。 与此同时,保罗也视独身为一种特殊恩赐。独身并非比婚姻更优越或更低下,而只是一种不同类型的奉献方式。通过独身,信徒可摆脱世俗牵绊,以全心全意专注于神并更好地投入福音事工。由此可见,无论是婚姻还是独身,都同样出于神所赐,且能在末世张力之中帮助信徒为神的国度做好预备。 保罗说:“有妻子的,要像没有妻子一样”,意在提醒信徒不可过度依赖或执著于地上的关系与拥有,而应常怀末世性的眼光。对此,张大卫牧师在当代情境中进一步延伸,鼓励信徒要在神国的终极目标之下看待婚姻生活。换言之,婚姻并非仅仅为个人幸福而设,更是为了预备神的国度、在其中彰显圣洁。 归根结底,婚姻与独身都存在于神所设定的秩序与恩赐之中,信徒应按照神的旨意来理解并践行自己的人生形态。这样,信徒便能在末世的紧迫感中保持圣洁的生活,教会整体也随之更加坚固。 三、爱与奉献:“彼此担当重担”的群体塑造 加拉太书第6章中,保罗提出“你们各人的重担要互相担当”这一命令。对此,张大卫牧师认为,此话不仅局限于一般的邻舍之爱与服事层面,更包含信徒在对方生命中深度同在、与对方的痛苦和软弱共同承担的群体性奉献。 为使教会成为纯洁且圣洁的群体,不仅要根除罪恶、追求成圣,也需要有真诚的爱与服侍作基础。正如约翰福音第15章所言,“住在我的爱里”,爱并非单纯的情感宣示,而是藉着牺牲与奉献得以具体落实的生活态度。信徒彼此扶持:为经济困顿者提供帮助、为病痛者代祷、对在信仰中摇摆不定者给予包容与支持,乃是将基督的爱活出来的方式。 “彼此担当重担”并不仅仅是为解决问题的手段,更是一条让教会在“爱”的维度上不断成长的道路。信徒将他人的需要放在首位、以耐心与奉献践行爱时,也就逐渐将耶稣基督舍己的爱内化于心。通过这种种努力,教会在当代社会自我中心与个体化倾向的对照之下,展现出独特且宝贵的光亮与咸味。 张大卫牧师进一步强调,这种分担重担的实践不仅局限于教会内部,也应延伸至社会大环境。教会应积极参与并分担社会的伤痛和苦难,走上基督背负十字架的道路,进而成为在世上实践神之爱的“另一个可能”的群体。 四、葡萄树与枝子的比喻 在约翰福音第15章,耶稣教导说:“我是葡萄树,你们是枝子”,只有信徒住在主里,才能结出真正的果实。张大卫牧师将此视为理解教会纯洁性与信徒圣洁生活的关键性图景。 与主联合并不止于教条或情感,而是要在真实的生活与行为中结出果子。当信徒与基督紧密相连之际,加拉太书5章22-23节所列圣灵的果子就会自然而然地流露出来,而这不仅提升教会内部的纯洁,也能成为信徒在家庭、职场及整个社会领域中践行神旨意的动力源泉。 “住在我的爱里”既不是单纯的情感表白,也包含了积极顺服与奉献。住在基督里的信徒,会在婚姻关系上践行舍己之爱,若是独身者则以整个人生投入对神的敬拜与事奉;在教会中,彼此背负重担、分享痛苦,互相激励前行。在这联合与结果子的过程里,教会便有能力抗衡世俗的影响力,并彰显神的国度。 此外,约翰福音第15章同样也包含末世性的视角:脱离葡萄树的枝子会枯干。同理,若信徒未能与基督持久相连,就无法保持圣洁。张大卫牧师提醒我们,当今社会虽然充斥着混乱与诱惑,但唯有依靠真道和圣灵的带领,并持守与基督的联合,才得以在这末世中持续过圣洁和纯洁的生活。 五、当代文化与哲学背景下的意义 正如上述探讨所示,张大卫牧师依据哥林多前书5-7章、以弗所书5章、约翰福音15章等经文,为今日的教会如何在文化与道德混乱中彰显圣洁,提供了具体的启示。我们可总结如下: 首先,教会的纯洁性不是可有可无的选择,而是必须完成的使命。教会是基督用宝血所买赎的,这一身份决定了她必须站立在真理之上,决不能容忍罪恶或向世俗价值观妥协。通过个人的圣洁与群体的合一,教会才能保持属灵纯洁。 其次,婚姻与独身都体现了神的创造秩序与恩赐,信徒应从神国度的视角重新审视各自的生命状况。婚姻体现基督与教会的联结,独身则能使人不受世俗桎梏,全情投入福音事工。两者同样重要,且能在末世张力之中使人预备神的国度。 第三,爱与奉献的群体实践,是教会圣洁与纯洁的具体展现。它不仅是一种服事行动,更是信徒彼此联结、共同体体验的核心途径。教会正因这样牺牲的爱而在自我中心的文化中闪耀独特的见证,也为社会带来真正的盼望。 第四,通过葡萄树与枝子的比喻可以发现,信徒与教会真正结出果子、彰显圣洁与纯洁的根源都在于与基督的联合。唯有住在主里,才能不断汲取圣灵的力量,在个人与社会层面实践神的旨意。 第五,在当代多元文化与哲学思潮之下,教会应当成为见证基督真理的“另一个共同体”。正如保罗在面对古希腊哲学与哥林多的道德败坏时,以福音作为终极答案,今天的教会也必须在林林总总的思想与价值观前勇于提出救赎与生命真理,并以见证性的生活来证实这真理。 第六,张大卫牧师的牧会思想将这些神学原则切实体现在教会现场,让信徒不仅理解,更能在生活各方面加以践行。他鼓励信徒无论在婚姻、独身、家庭、教会或社会,都要遵行神的旨意、彼此建造、服事他人,在世上彰显神的荣耀。当信徒成为神国度的器皿时,教会便预备好自己如新娘般等候主的到来,也具备转化社会的动力。 总的来说,张大卫牧师的教导鼓励教会和信徒超越宗教形式或外在的道德主义,而是在日常生活的各个领域具体活出圣洁。通过不断悔改、追求成圣、奉献与爱,以及在末世盼望中的婚姻与独身生活,并在基督里结出丰硕的果实,教会能重新认识自己的真实身份,在世上发挥盐与光的功用。 张大卫牧师不止于教导圣经知识,更致力于引导信徒在当代道德紊乱、属灵冷漠的环境中,将神的话语实践出来。这帮助教会不再局限于教义一致性的层面,而能真正成长为圣洁纯洁的属灵团体,对世界产生属天的影响力。在婚姻、独身、家庭、教会等所有关系里活出神的创造秩序与爱的法则,扩展神的国度,彰显神的荣耀,教会方能如圣洁的新妇,被带到主面前。 这一教导不仅存在于理论层面,更被视作现代信徒在个人生活中应当努力落实的实践目标:在婚姻中彼此服事,在独身中专心献身,在教会里彼此分担重担,并在基督这棵葡萄树上结出生命果实,好在世界中成为活生生的见证。 因此,当代的教会与信徒需要深思并践行张大卫牧师的神学与牧会取向,在现实的场景中更积极地付诸行动。保持教会的纯洁与信徒的圣洁是不可回避的责任,而唯有如此,才能真正彰显神的荣耀,并为神国的降临预备道路。通过这一实践,教会得以在世间发挥实质性的属灵影响力,信徒则能成为见证神的真理与爱的使者,在各种处境中散发出属天的光彩。

現代教会の聖潔と純潔に向けた指針 – 張ダビデ牧師

現代社会は急激に変化する文化的・哲学的・道徳的環境の中で、教会と信徒たちに根本的な問いを投げかけている。すなわち、彼らはどのようにアイデンティティを維持し、聖書的真理を生活に適用しながら生きていくのかという課題に直面しているのだ。物質主義、相対主義、世俗化、宗教的無関心、道徳的混乱といった現象は、教会と信徒に単に伝統的規範にとどまるのではなく、より根本的かつ実践的な信仰的対応を求めている。このような状況の中、張ダビデ牧師は聖書の深い洞察を現代の生活に適用することに力を注ぎ、とりわけ教会共同体の純潔さと信徒の聖なる生き方を強調している。 張ダビデ牧師は、パウロ書簡やヨハネの福音書15章、エペソ書、テサロニケ第一の手紙、ガラテヤ書、ローマ書など新約聖書の多様な本文を総合的に解釈する。彼は教会を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た霊的実体として理解し、そこから教会が聖潔で純潔な共同体として建て上げられるべきだと力説する。これは単なる外面的な道徳性や倫理基準の確立にとどまらず、信徒一人ひとりがキリストのうちにとどまる生活を実践することで、教会全体が世の中で神の栄光を現すビジョンを持つことにある。 特にコリント第一の手紙5〜7章でパウロが扱う、教会内の淫行や道徳的混乱、結婚と独身の問題などを現代的に再解釈しながら、張ダビデ牧師は今日の教会と信徒たちがいかに真の聖潔と純潔を保持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るかについての実践的な指針を提示する。彼は教会が世の価値観に流されて妥協したり、罪を放置したりすることなく、キリストとの霊的連合のうちで聖潔を回復すべきだと強調する。 本稿では、こうした張ダビデ牧師の神学的方向性と牧会的強調点を踏まえ、以下の六つの小主題に焦点を当てる。第一に、教会の純潔を成し遂げるための神学的・聖書的土台。第二に、結婚と独身を終末論的視点の中で再解釈した信仰と生活。第三に、互いの重荷を負い合い愛を実践する共同体的献身。第四に、ヨハネの福音書15章のぶどうの木と枝のたとえを通して示される、信徒とキリストの連合と実を結ぶこと。第五に、これらすべての主題が現代文化・哲学的背景の中で持つ意味。第六に、それらを総合して教会と信徒がこれから進むべき方向を模索する結論的提言である。 教会の純潔 張ダビデ牧師の核心的メッセージの一つは、教会の純潔である。これは単なる制度的な清潔さや倫理規範の管理ではなく、教会がキリストと深い霊的連合を通して聖なる花嫁として備えられていく過程を意味する。エペソ書5章では教会がキリストの花嫁にたとえられており、キリストが教会のためにご自身を犠牲とされた目的は「聖く傷のない」共同体を築くことだと明かされている。これを受けて、張ダビデ牧師は現代の教会が世俗的な価値観や道徳的堕落に染まらないよう、絶えず自己省察と悔い改めを通じて本質的アイデンティティを守るべきだと力説する。 コリント第一の手紙5〜6章でパウロは、教会内に広まった淫行や倫理的堕落を断固として指摘し、罪を除去して共同体の純潔を維持するよう促している。張ダビデ牧師はこの本文を踏まえ、淫行を単なる道徳的堕落ではなく、教会の霊的本質を損なう深刻な問題と解釈する。教会が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た体であるなら、不道徳な行為は教会という体に化膿した傷を残すようなものだというのである。 テサロニケ第一の手紙4章でパウロが「神のみこころはあなたがたの聖潔である」と宣言している点に注目しつつ、張ダビデ牧師は罪を単なる倫理基準ではなく、神との関係の中でとらえることを提案する。聖化とは道徳的改善の次元ではなく、キリストのうちにとどまり、聖霊の力によって内面が変化するプロセスである。それを通じて信徒は淫行、虚偽、貪欲など世俗的誘惑を退け、教会共同体は世の中で聖なる光を放つことができる。 コリント第一の手紙6章に出てくる「あなたがたの体は聖霊の宮である」というパウロの教えを引用しながら、張ダビデ牧師は個人の倫理問題が教会全体の霊的状態と直結していることを強調する。信徒が自らの生活を神にささげる聖なるいけにえ(ローマ12:1)としてささげるとき、そうした純潔な生活が積み重なって教会共同体全体がより清められ、神の栄光を現す証人として機能するようになる。 結婚と独身 コリント第一の手紙7章でパウロは、結婚と独身、夫婦関係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が、これは単に当時の文化的問題への反応ではなく、創造の秩序と終末論的緊張の中で信徒の生活を解釈する神学的原理を含んでいる。張ダビデ牧師はこのパウロの教えを現代的に再解釈し、結婚と独身はいずれも信徒の信仰的献身と聖潔を成し遂げる多様な形態であると強調する。 結婚は社会的な契約や肉体的な結びつきにとどまらず、エペソ書5章で提示されているようにキリストと教会の連合を象徴する聖なる制度である。夫と妻は互いに献身し、責任を果たし合うことによって神の創造の秩序を実践し、家庭という小さな共同体の中で聖潔を具現する。 一方、パウロは独身を特別な賜物として言及している。独身は結婚より優れているとか劣っているという状態ではなく、ただ異なる献身の形である。それによって信徒は、世俗的な縛りなく神に全力で集中し、福音宣教に献身することができる。結婚も独身も、いずれも神が与えられた生活の形態として、終末論的緊張感の中で神の国を準備する信徒の姿勢として解釈されうる。 パウロが語る「妻のある者は、ない者のように生きなさい」という表現は、信徒が地上の関係や所有に過度に執着せず、終末論的な視点をもって生きるよう促すものである。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現代的に広げて、結婚生活でさえも神の国という究極的目的の中で解釈するよう提案する。結婚は単に個人的な幸福のための制度ではなく、神の国の拡大を備える聖なる場なのだということである。 結局、結婚と独身はともに神が与えられた賜物と秩序の中にあり、信徒は自らの生き方の形態を神のみこころに従って解釈し、実践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によって信徒は終末論的緊張の中で聖潔で純潔な生活を送り、教会共同体もより強固なものとなる。 愛と献身:「互いの重荷を負う」共同体の実現 ガラテヤ書6章の「互いの重荷を負い合いなさい」というパウロの命令に注目した張ダビデ牧師は、これを単なる隣人愛や奉仕の次元を超え、信徒同士が互いの生活に深く関わり合い、苦しみと弱さを共に分かち合う共同体的な献身として解釈している。 教会が純潔で聖なる共同体として立つためには、罪を除去して聖化を追求するだけではなく、真の愛と仕え合いが支えとなるべきである。ヨハネの福音書15章でイエスが「わたしの愛のうちにとどまりなさい」と語られたように、愛は単なる感情ではなく、犠牲と献身によって実践される生き方の態度である。信徒たちは経済的困難に苦しむ人を支え、病気で苦しむ人のために祈り、信仰的に揺らぐ人を忍耐強く立て上げることで、キリストの愛を生活で示す。 互いの重荷を負うということは、単に問題解決のための手段ではなく、教会が愛の共同体として成長していく過程そのものである。信徒たちが互いの必要を自分のこと以上に優先し、忍耐と献身をもって仕え合うとき、彼らはイエス・キリストの犠牲的な愛を身につけるようになる。これによって教会は、現代社会の利己的・個人化された生活様式とははっきりと対照をなし、世の中で真の光と塩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ようになる。 張ダビデ牧師は、この重荷を負い合う愛が教会内部にとどまらず、世の中へも拡張されるべきだと強調する。教会は世の苦しみや痛みに共に参与し、キリストが担われた十字架の道をたどる共同体として、世の中で神の愛を実践するオルタナティブな共同体になるべきなのである。 ぶどうの木と枝のたとえ ヨハネの福音書15章でイエスは「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ある」と語り、信徒が主にとどまるときに真の実を結ぶことを教えている。張ダビデ牧師はこのたとえを、教会の純潔と信徒の聖なる生活を理解するための中心的パラダイムとして提示する。 主との連合は教理や感情にとどまらず、実際の生活と行動によって実を結ぶプロセスである。信徒がキリストにとどまるとき、聖霊の実(ガラテヤ5:22-23)が自然にあふれ出し、それは教会内部の純潔はもちろん、家庭や職場、社会全般において神のみこころを実践する原動力となる。 「わたしの愛のうちにとどまりなさい」というイエスの命令は、感情的表現に終わらず、積極的な従順と献身を求めるものである。キリストのうちにとどまる信徒は、結婚生活においては犠牲的な愛を実践し、独身者であれば生涯を神にささげる献身を貫き、教会の中では互いの重荷を負い合う愛を分かち合う。こうした連合と実を結ぶことによって教会は世俗的影響力に抗し、神の国を現す根本的な力となるのだ。 ヨハネの福音書15章のたとえには終末論的観点も含まれている。枝がぶどうの木から離れると枯れてしまうように、信徒はキリストとの連合なくして聖潔を保つことはできない。張ダビデ牧師は世俗的混乱の中で、信徒が真理のことばと聖霊の導き、そしてキリストとの持続的な連合を通じてのみ、聖潔で純潔な生活を続けられることを改めて示している。 現代的適用と結論 ここまで見てきたように、張ダビデ牧師はコリント第一の手紙5〜7章、エペソ書5章、ヨハネの福音書15章などの聖書本文を通じて、現代の教会が直面する文化的・道徳的混乱の中で、どのように純潔で聖潔な生活を実践できるかを具体的に示している。これを要約すると、以下のとおりである。 結局、張ダビデ牧師の教えは、教会と信徒が単なる宗教的義務や形式的倫理にとどまらず、実際の生活のあらゆる領域で聖潔を実現する道を示している。それは悔い改めと聖化、献身と愛の実践、終末論的緊張の中での結婚生活や独身生活、そしてキリストのうちに豊かに結ばれる実を通して具体化される。これによって現代の教会は、自ら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再発見し、世の中で真の光と塩として機能できるのである。 張ダビデ牧師は、単に聖書の知識を伝達することに終始せず、信徒が道徳的混乱と霊的無関心の時代の中で神のことばを実際の生活に適用できるよう導いている。それは教会が教理的一致にとどまるのではなく、聖潔で純潔な共同体として成長し、世の中に影響力を与える使命を果たすよう助けるものでもある。結婚、独身、家庭、教会といったあらゆる関係性の中で、神の創造の秩序と愛の原則を実践し、神の国を拡張し神の栄光を現すとき、教会は清く輝く花嫁として主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だろう。 これらの教えは理論的な次元を超え、現代の信徒たちがそれぞれの生活の中で実践すべき具体的な課題として提示されている。結婚生活における相互の仕え合い、独身者の全幅的な献身、教会共同体内での重荷の分かち合い、そしてぶどうの木であるキリストにとどまって結ぶ実を通して、信徒たちは世の中で真理を明かしする生きた証人となるのである。 したがって、現代の教会と信徒たちは張ダビデ牧師の神学的・牧会的方向性を熟考し、それを基に生活の現場で積極的に実践するよう求められている。教会の純潔と信徒の聖なる生活は選択ではなく必須の課題であり、それによって神の栄光と神の国の到来が準備されるからである。これを通じて教会は世の中で真の霊的影響力を発揮し、信徒は神の愛と真理を実現する証人として堂々と立ち上がることができ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