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라 – 장재형목사
1.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과 죄의 본질 장재형목사가 강의한 에베소서 4장에서 그의 초점은 바로 사도 바울이 권면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이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전의 옛 삶, 곧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 4:22), 이제 새로워진 심령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받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권면은 신약성경곳곳에 두루 등장하며,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컨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거듭난 사람의 변화를 강조한다. 바로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 중생(born again)이며,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존과 윤리적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변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죄의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8절에서,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요한복음 16장 9절에서는“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시며, 죄를 한 줄로 요약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것이야말로 죄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고별설교에서 짧지만 본질적인 정의를 내리셨다면, 사도바울은 여러 서신을 통해 죄의 구체적인 면모와 인간의 타락성을 보다 세부적으로 다룬다. 로마서 1장 29-31절이나고린도전서 6장 9-10절,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골로새서 3장 8-9절, 디모데전서 1장 9-10절 등에 죄의 다양한 양상과목록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얼마나 깊이 죄에 물들어 있는지를 폭넓게 보여준다. 인간은 죄의 힘에 사로잡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인간의 어두운 실존은 창세기부터 분명히 드러나지만,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그 악함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고,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복음 전파 사역 중 “죄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은혜가 얼마나 큰지 결코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여러 차례 전해왔다. 죄의 심각성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이 왜필요한지 절감하게 되고, 그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논지다. 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의 인격과 윤리, 행동 전반에 대한 전환을 요구한다. 많은 이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롬 10:9-10)하여 구원에 이르지만, 실제 삶이 변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이것은 죄의 뿌리가 깊고, 또 인간적 욕심과 옛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은 ‘옛 사람을 버리고새 사람을 입는다’는 추상적 구호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 변화를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으로 풀어낸다.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이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엡 4:25). 둘째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고(엡 4:26), 이어 ‘도적질하지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라’,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라’ 등등의 권면이 이어진다(엡 4:28-32).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은 죄가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에서 드러나는 악한행동, 말을 통한 파괴, 정욕과 욕심, 폭력과 위선 등 전인적인 타락으로 확대된다는 점을 경고한다. 동시에 우리는 새 사람이되었으므로, 이러한 죄의 열매들을 버리고, 진실과 사랑, 인자와 용서, 거룩과 경건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당부받는다. “새 사람”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거듭남’을 강조하신 말씀(요 3:3-5)과 맞닿아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는 육체적 재탄생이 아니라 영적 재탄생, 곧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을 뜻한다. 따라서 이 거듭남(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이루어지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를 “너희가 그 은혜를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생 이후에도 죄의 잔재가 우리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옛 사람을 계속해서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선언하는데, 이 말씀 또한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결단을 요구한다. 실제 신앙인의 삶 속에서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옛 습관과 죄성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새 사람’의 삶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직선한 말로 덕을 세우라”(엡 4:29),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엡 4:28)고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본받아, 이제는 빛의 자녀로서(엡 5:8) 세상을 살아가라는 구체적 요청이다. 부정적인 것을제거하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하나님의 선으로 채워야 한다는 메시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게 된 자라면 거짓을 버려야 한다’는 논리다(엡 4:25). 크고 작은 거짓으로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죄의 대표적 특징이다. 십계명의 제9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인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오늘날 미디어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거짓과 과장, 허위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자주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것을 말하고 옳은 것에만 굳게 서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진리 위에 견고히 서 있지 않으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이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크기 때문이다. 결국 “새 사람을 입으라”는 에베소서의 명령은 우리의 본질적 죄성을 해결하는 복음의 능력을 붙들고, 거기에서 출발해 삶전체를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죄는 단순히 믿지 않는 상태나 몇 가지 잘못된 행위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전 인격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그리고 영적 삶 전반에 파급력을 갖는다. 따라서 복음을 통해 얻은 구원은 그 죄의 뿌리를 뽑아내고, 동시에 성령의도우심으로 의와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한 뒤, 그에 걸맞은생활 윤리를 가르치는데,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로 요약되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죄를 계속해서 벗어버려야 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레 19:2, 벧전 1:16).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분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하며, 이것이 신구약의 공통된 선언이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너희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고, 범죄한이후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산다면, 당연히 거짓과 악을 버리고진리와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일서 1장 5절 이하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고선언하며,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함을 촉구한다. 이 빛과 어둠의 대조가 죄와 의, 거짓과 진실, 사망과 생명, 마귀와 하나님이라는 두 왕국 간의 대립을 상징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빛의 세계로 옮겨진 자다(골 1:13). 따라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정체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옛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새 사람인 체하는 위선에 빠지기 쉽다. 바울이 수시로 교회 안의 문제를 지적한 것도, 그 안에 여전히 거짓과 분열, 도적질과 음란 등 옛 삶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라면, 그 옛 습관과 죄악을 ‘아예 벗어버리고’(엡 4:22) 오직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은새로운 인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설교와 책을 통해 “거룩”과 “성결”이 단지 외적인 행동 수칙을 지키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인간 마음 깊숙이자리 잡은 불신과 죄성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사람들은의지력이 강하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죄를 완전히 끊어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어야, 비로소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한편으로는 죄를 철저히 버리라는 경고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주시는 능력 안에서 이제 우리가 거룩과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선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며, 동시에 구원받은 공동체가 세상에서 마땅히 드러내야 할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의 구체적 권면 가운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바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말라”(엡 4:26)라는 구절이다. 본래 산상수훈에서는 “분을 내지 말라”는 식의 강력한 가르침이 있지만, 여기서 바울은 인간이살아가면서 분을 내야 하는 정당한 상황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분노 자체가 죄가 아니라, 분을 잘못 다룰 때 죄로이어지고 파멸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분노에는 때때로 의로운 분노(義憤)가 있다.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내쫓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이 짓밟히는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셨다(마 21:12-13, 요 2:15-16 참조). 이것은 죄나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이며, 우리가 세상의악이나 불의함을 보고도 아무런 통증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적 무감각 상태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정당’하거나 ‘의로운’ 이유로 시작된 분노라도, 자칫 통제되지 않으면 곧 죄의 문을 열어줄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분노를 잘못 처리하여 패망에 이른 여러 인물을 통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가인이다(창 4:1-16).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데 대해 가인은 심한 분노를 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가인에게 “네가 분을 내는 것이 옳으냐? 죄가 네 문 밖에 엎드려 있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창 4:6-7 참조). 가인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는 참혹한 범죄로 이어진다. 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되었고, 가인은 지독한 저주와 방황의 길에 들어섰다. 즉,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단적으로보여주는 예다. 또 다른 예로 구약의 선지자 요나를 들 수 있다. 요나서 4장에 따르면,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자, 요나는오히려 몹시 화가 나서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 4:9)라고 말한다. 그의 분노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까닭없는 분노였다.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에서 구원받았으면 선지자로서는 기뻐해야 마땅한데, 그는 그들의 멸망을 더바라며 화를 낸 것이다. 하나님은 벌레를 사용해 박 넝쿨을 마르게 하심으로 요나를 책망하셨고, “네가 이 박 넝쿨도 아끼거든, 니느웨 백성들은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라고 하셨다. 이는 분노가 합당한가를 헤아려보지않고, 자기중심적으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이유로만 화를 내는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대 사회에서도 ‘분노 조절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을 비롯한 다양한 연령층이 일상에서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극단적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여러 교육프로그램이나 설교에서, 인간 내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극단적 분노나 절망에 휩쓸릴 수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런 분노는 자기 파괴와 대인관계 파괴는 물론, 신앙의 길 전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에베소서 4장 26절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일상의 매우 실제적인가르침이 된다. 분노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인간적 감정이다. 그러나 그냥 “화내지 말라”는 도덕적 훈계만으로는충분치 않다. 바울은 바로 뒤에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말하는데, 이는 분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쉽게원망, 증오, 폭력, 음모, 거짓 등으로 치닫고, 그 결과 사단이 활개칠 여지를 준다는 뜻이다. 분노가 죄로 이어지는 주요 경로 중 하나가 “혀”다. 에베소서 4장 29절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명령한다. 야고보서 3장 역시 혀를 “불의의세계”라 칭하며(약 3:6), 작은 불꽃이 큰 숲을 태우듯,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지니는지 경고한다(약 3:1-12). 혀로 뱉는말이 상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변함없는 진리다. 문제는 분노가 극심해지면 가장 먼저실수하는 영역이 말이라는 점이다. 격분 상태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이후 돌이킬 수 없는갈등으로 번진 사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베소서 4장 26-29절의 교훈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첫째, 분노를 느끼더라도 죄로 치닫지 않도록주의하라. 둘째, 해가 지기 전까지 그 분을 풀라. 셋째, 말로 상대를 해치지 말고, 오히려 은혜를 끼치는 방식으로 대화를전환하라. 이것이 신자들이 삶에서 분노를 다루는 올바른 원리라 할 수 있다. 분노가 쌓이기 시작할 때, 그 싹을 초기에 자르는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증오가 점차 깊어져서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된다. 틈을 준다는 말은, 마귀가 마음을파고들어 분노를 더 키우고, 온갖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는 것을 뜻한다. 이쯤 되면 심지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고, 더 나아가영적 영역에까지 치명적 손상을 일으킨다. 분노를 다스리는 구체적 방법론으로, 히브리서 12장 2절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앉으셨느니라.”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극도의 고통과 수치를 참아내셨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고통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사랑과 순종을 선택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앉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 우리가 이 예수를 바라볼 때, 분노 대신 오히려 참음과 사랑, 용서와 인내의 길이 열리게 된다. 구약의 모세 또한 분노로 인한 실패를 경험한 대표적 인물이다. 애굽 궁중에서 자란 모세는 애굽인의 부당한 폭력을 보고의분을 느꼈지만,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애굽인을 죽이고 말았다(출 2:11-15). 이는 모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과로이어졌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로 피신하여 오랜 기간 양을 치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40년간의 훈련끝에 모세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애굽 궁에서 배운폭력과 힘이 아니라, 온유로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수 있게 된 것은, 모세가 그 온유함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을 종합해볼 때, 분노는 그 자체로 완전히 없앨 수 없는 인간의 정서이지만, 적절한 통제와 해소를 하지 않으면 쉽게죄가 되고, 스스로와 타인을 파괴한다. 장재형목사는 “분노를 비롯한 감정들을 묻어두기보다는 복음 앞에 솔직하게 꺼내 놓고,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성찰할 때 비로소 치료와 회복이 시작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제 상황을 회피하거나 ‘무조건참으라’는 식의 권위적 강요가 아니라, 말씀으로 내면을 조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분노의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는메시지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1절에서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결론적으로 선언한다. 이 악독(malice)은 뱀의 독처럼 은밀하고 집요하게 영혼을蝕(식)해 들어가는 증오심이기도 하다. 떠든다는 것은 소란과 다툼을 의미하고, 훼방은 비방과 모함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은 결국 전부 다 분노와 미움에서 비롯되는행동들이다. 따라서 “의분이니 괜찮다”며 방치하기엔 인간의 분노가 너무나 위험한 감정임을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혹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든 갈등 상황이 생길 때, 우리는 에베소서 4장의 가르침을 늘 기억해야한다.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화해를 이루거나 마음의 앙금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위해서는 용서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용서의 근거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서로 용서하라”(엡 4:32)라는 복음의 원리다.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입었다면, 나도 마땅히 다른 사람을용서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은 결국 분노의 문제, 혀의 문제에서도 명확히 적용된다. 바울은 분노를 싹 제거하라는 소극적 명령에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한 말을 함으로써 서로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한다(엡 4:29). 우리가 분노와 불평, 비방의 말을내려놓고, 진리와 사랑, 격려와 칭찬의 말을 선택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며,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난다. 분노는 자연스럽지만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더욱이 죄로 발전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바울의 권면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영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다. 결국,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더 큰 사랑 안에 거해야 가능해진다.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인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분노 대신에 극률과 용서, 사랑과 화해를 선택할힘을 얻는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본질이요, 새 사람의 특징이다. 예수를 깊이 묵상하지 않는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가죄가 되는 것을 매번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분노가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을바로 닫고 오히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사랑의 실천이 곧 “새 사람”의 실천이다. 에베소서 4장의 말미(엡 4:28-32)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신자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윤리를 구체적으로열거한다. 그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고 권면하면서, 그 목적을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즉,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이기적 삶이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제’라는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죄의 본질이 ‘빼앗고 착취하는 것’에있다면, 새 사람의 삶은 ‘베풀고 구제하는 것’으로 반대되는 원리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함을 뜻한다. 십계명에서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는 제8계명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17)는 제10계명을 동시에확장해볼 수 있다. 물질만을 훔치는 행위 뿐만 아니라,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나 기회를 빼앗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도적질이다. 교회 안팎에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 혹은 합법적이지만 윤리적으로부당한 이득을 챙기는 방식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도적질로 간주될 수 있다. 새 사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도적질하지 않는 데’ 그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소득을 공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이사도행전 20장에서 고별설교할 때, 스스로 자기 손으로 일하여 궁핍한 자들을 도왔다는 자전적 고백을 한 것은(행 20:33-35), 그가 직접 이 원리를 몸소 실천한 예다. 이어지는 권면에서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며,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고 한다. 새 사람의 특징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듯이, 혀는너무나 작은 지체이지만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큰 키와 같고, 작은 불씨로 큰 산불을 일으키는 무서운 잠재력을 지닌다(약3:1-6). 따라서 이 혀를 통해 “은혜를 끼치는 말”을 전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윤리적 의무이자 특권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거하신다면, 우리의 말투와 언어 습관에도 반드시 변화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권고한다.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며,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악을행할 때 근심하신다. 이미 우리 안에서 인치심을 통해 구원의 확증을 주신 분께 우리가 거슬러 행동한다면, 성령이 근심하시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내 삶을 조정하는과정이다. 우리가 악한 욕망이나 분노, 거짓, 더러운 말 등에 사로잡히면, 바로 그 성령의 민감한 음성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영적 성장이 막히거나 후퇴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 31-32절에서 바울은 총체적으로 한 번 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대비시킨다. 버려야 할것들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의”다(엡 4:31). 대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는말씀이다. 이 구절은 새 사람의 윤리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가 기준이되므로, 이것은 엄청나게 높은 표준임을 알 수 있다. 왜 바울은 서로 용서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할까?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분열과 다툼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덕목이용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마 6:12)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에게 죄를 범한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진정성을담을 수 없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도동료의 적은 빚을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지적하시며, 용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셨다(마 18:21-35). 장재형목사는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 또는 교회의 분쟁 해결을 다룰 때, 에베소서 4장 32절을 자주 인용하면서 “용서란 나의힘이나 도덕적 선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적인 관점에 머무르면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지? 저 사람이 잘못했는데?”라는 마음이 생기지만, 복음의 빛 아래에서는“나도 용서받은 죄인이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의식이 앞서기에, 용서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바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삶이다. 바울은 단지 “용서가 좋으니 해라”라는 당위만 설파하지 않는다. 그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기독교 윤리의 특징은 인간적 선행을 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와 속성을 본받는 데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가 우리의 표준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때문이고(요일 4:19),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신자의 삶의 근거이자 동력이다. … Read more